토지 읽기(6)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수없이 많다. 한 사람의 작가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가 신기하다. 여기에 바로 작가 역량이 달려 있다. 힘이 달리는 작가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뭉술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다. 그 인물들이 어떤 순간에 경험하는 것들이 박경리 작가의 세계를 보는 눈이다. 그는 루돌프 오토가 ‘누미노제’(거룩한 두려움)라 규정한 어떤 삶의 심연을 여기에 묘사하고 있다.
조찬하는 친일귀족 조병모의 둘째 아들이다. 형 용하는 요즘 식으로 소위 재벌 2세쯤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반면에 찬하는 최소한 인간적인 품성을 갖춘 인물이다. 당시 일본에 가서 대학까지 나온 신여성인 명희가 나타난다. 형제가 다 마음에 들어 한다. 형은 이미 기혼자다. 동형 용하는 동생도 이 여자를 흠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정식으로 이혼한 뒤에 매파를 통해서 이 여자와 재혼에 성공한다. 찬하는 실망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여자와 결혼한다. 형은 여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독점욕으로 결혼한 것뿐이다. 형제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반복된다. 결국 형은 여자를 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여자는 가출한다. 찬하는 일본에서 잠시 귀국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일본인 오가타와 함께 명희가 머물고 있는 진주 행 열차를 탄다.
시트에 머리를 얹은 고가타는 잠이 든 것 같았다. 레일을 구르는 기차 바퀴 소리가 정확한 간격으로 울려온다. 규칙이 무엇인가를 골수에 새겨 넣듯, 새겨진 곳에 또 새기고 또 새기며 영원히 그리할 것처럼, 사람은 사라지고 그 소리만 남을 것처럼 기차는 커다란 밤의 아가리 속을 뚫고 남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떠도는 불빛 아래 오가타뿐만 아니라 대부분 승객들은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한 불빛과 바퀴 구르는 소리와 칠흑 같은 창밖의 어둠, 그리고 잠들어버린 각양각색의 얼굴들, 찬하는 생명의, 삶의 부재(不在) 같은 것을 느낀다. 들국화 코스모스도 없는, 한 마리의 나비도 없는 철로 연변에 야적된 석탄을 비추며 반사하던 그 둔중한 빛마저 없는 석면(石綿)과도 같은 어둠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가. 찬하는 어떤 전율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도착한 그곳도 저 깊이 모를 창밖의 어둠과 같은 어둠이 있을 뿐일까.’
삶이 끝난 곳을 생각하게 했지만 찬하는 그 항구에 있다는 한 여인 곁에 당도했을 적에도 한 줄기 빛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14권, 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