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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공부, 2015년 6월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8장 빌닷의 충고(1)
성경을 무조건 읽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바르게 이해하는 수준까지 이르려면 최소한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본문 정확하게 읽기(번역 문제), 둘째는 주석하기(역사 비평), 셋째는 해석하기다(조직신학). 이 세 단계가 종합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욥기처럼 신학적인 논쟁이 첨예화된 성경은 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8: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빌닷이 욥을 비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은혜롭다고 여긴다. 이 구절 자체는 틀린 게 아니지만 문맥에서 볼 때는 옳지 않다. 선생(목사, 부모,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잘못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도그마로 적용하는 것이다.
빌닷의 논조는 욥이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유대의 지혜 전통에 따르면 욥의 태도는 문제가 많다. 앞서 7:21절에서 욥은 자신의 의를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죽어 버릴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한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깝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의 지혜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과 재앙은 반드시 죄의 결과다. 욥의 자녀들이 졸지에 죽은 것도 죄가 원인이다. 빌닷도 욥을 무조건 몰아가는 것은 아니다. 지혜 전통을 찾아서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것이다.
빌닷은 8절에서 조상들의 지혜를 거론한다. 옳은 말이다. 성경도 기본적으로는 조상들의 영적인 지혜다. 농사일도 그렇고,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의 전문적인 학문도 과거로부터 지혜가 내려오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9절에서는 개인이 인식론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개인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초월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다.
빌닷은 11절 이하에서 비유와 속담 등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갈대가 아무리 잘 자란다 해도 물이 없으면 일찍 말라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무너진다(13절). 욥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불행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빌닷 보기에는 불신앙이다.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신앙의 지혜와 배치되는 것이다.
욥의 불신앙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빌닷은 20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주지시킨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않는다.’ 이게 유대의 지혜 전통이다. 빌닷은 이런 지혜 전통에 근거해서 욥을 21,22절에서 격려한다. 하나님이 자네를 행복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호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구호는 빌닷의 주장보다 훨씬 격이 떨어진다. 이 문제는 이 시대정신과도 연관된다.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신자유주의는 욥의 운명을 실패로 규정할 것이다. 사실 빌닷의 주장은 전혀 잘못이 없어 보인다. 큰 불행에 떨어진 친구를 향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웬만하면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욥은 저항한다. 누가 옳은가?
어제 파일이 올라온 즉시로 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욥의 태도를 보면서 신앙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있습죠.
궁극의 어떤 지점에서, 신앙은 참으로 외로운 것이구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것은 제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느끼는 양가 감정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알고자 해도 모른다는 사실만 확연하게 다가오는 그 외로움과
뭐라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든든함, 상반되는 이것들이 공존한다는 게 처음엔 참으로 혼란스러웠는데 말이죠. 지금은 때때로 좀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