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8일
씨의 현실
막 4:26-34절에 나오는 ‘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 또는 본질에 대한 것이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즉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질적으로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씨는 바로 이 세상이며, 씨에서 나오는 줄기나 꽃이나 열매는 하나님 나라이다. 한 걸음 나가서 지금 우리의 삶은 씨이며, 미래의 부활은 열매이자 꽃이다. 이 두 세계는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이다.
다음의 질문이 가능하다. 부활 생명이 충일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은 오늘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 여기서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저절로 주어질, 그리고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피할 수 없다.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기독교인으로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예수님이 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 삶이라 할 씨의 현실(reality)에 대해 한 마디만 하자. 여기서의 삶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걸 단순히 그림자만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그런 입장은 초기 기독교의 한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던 것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이 그림자 같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록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구체적인 삶을, 말하자면 몸으로 살아가는 삶을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당신들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세속적인 직업 자체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본 것도 이런 입장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 삶, 몸, 인격은 완성된 게 아니다. 즉 구원받은 게 아니다.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씨가 꽃으로 발화되기를 기다리듯이.
예,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질문의 요지는
'씨는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 자신이 아닙니까?'지요?
그 질문과 저의 위 꼭지글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씨의 현실을 지금의 삶이라고 말한 것 때문인가요?
지금 씨 이야기는 메타포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설명하면서
저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가리킨다고 말했어요.
그것도 메타포에요.
어떤 사건을 은유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거지요.
그래서 씨를 예수, 그 말씀으로 보든지,
하나님 나라로 보든지,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한 우리 삶으로 보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메타포는 메타포로 읽어야지
실체로, 또는 알레고리로 읽으면 성경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을 보면 씨는 천국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 안에 생명으로 계십니다.
따라서 씨는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 자신이 아닙니까?
그리고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마 13:38)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 자신이 뿌려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씨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니 주님 자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밭은 세상이라기 보다 마음 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태복음에는 그렇게 나와 있는 것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