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딱지치기
지난 설교에서 딱지치기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 딱지치기는 내 삶의 리얼리티였다. 밥 먹고, 공부하고, 심부름 하는 등, 다른 일도 했지만 딱지치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학교에 가서도 딱지치기를 했으니, 그야말로 그게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아이들의 놀이가 딱지치기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계절에 따라 유행이 달라졌다. 그중에 딱지치기가, 또는 구슬치기가 가장 대표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개의 아이들은 조금 나이를 먹으면,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그런 놀이를 시들하게 여긴다, 삶의 리얼리티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이의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딱지치기의 태도로 사는 건 똑같아 보인다. 어릴 때 딱지치기에 빠져서 밥 먹으러 집에 들어가는 것도 깜빡한 것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실제 삶을 놓치고 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말았다. 소위 상업주의가 한국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가 지금 한국문학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데, 한국 문학이 상업주의에 물든 결과라는 지적은 옳다. 교회도 진작부터 상업주의에 물들었다. 교회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표절도 마다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지금 돈에 빠져서 다른 걸 못 본다. 돈은 어린아이들의 딱지처럼 일시적으로 흥미를 유발할지 모르지만 실제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하지는 못하는데도 돈이 아니면 죽을 거처럼 여기고 산다. 이런 말이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가난의 서러움을 몸으로 겪어봐야만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돈이 딱지에 불과하다면 당신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빈손으로 살아보라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라서 딱지를 완전히 포기하진 못한다. 다만 그게 다 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은, 그래서 곧 손을 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안다. 알면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경숙 선생의 표절 사태는 불가사의로 보입니다.
이미 15년 전에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여전히 명성을 누렸다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사태가 불거진 뒤에 보이는 행태도 좀 그렇네요.
원래 남의 소설을 받아쓰는 걸로 소설 연습을 한 분이라서
의도하지 않게 착각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글이라는 게 지문과 같아서 아무리 비슷한 내용이라도 똑같이 나올 수가 없는데,
이번에 제시된 지문을 보니 표절이 분명해보입니다.
그건 그렇고 <엄마를 부탁해>를
나는 창작과 비평엔 연재될 때 몇 번 읽었지만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많이 팔렸을까요?
제가 문학을 평할 입장을 못되지만
좀 통속적인 주제에다가
이야기의 전개도 별로 독창적이지 않아 보이던데요.
신경숙 표절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정리될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신경숙 사건은 정말이지 유감입니다.
이번에 두 작품 다시 읽어봤는데
낯이 화끈거리는 게 창피하고 부끄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