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0일
소생(甦生) 전승에 대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건지, 아니면 죽음 가까이 갔다가 깨어난 건지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모른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예수님 공생에서 몇 번 더 일어났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이야기(눅 7:11절 이하)도 그 중의 하나다. 예수님은 아들을 태운 상여를 따라오면서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울지 말라 위로하신 후에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요 11장)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세련되게 정리되었다. 이 경우에도 막 5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중간에 지체하는 바람에 위중하던 나사로가 결국 죽는다. 시체를 가족묘지에 넣고 나흘이 지난 뒤에야 예수님은 그곳에 도착한다. 어쨌든지 여기서도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자 강시 같은 모습으로 나사로가 굴에서 나온다. 이런 이야기에는 전설적인 요소가 크게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야기, 즉 소생 전승은 예수님과 연관된 것 외에도 여러 곳에 나온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는 설교 시간에 짚었다.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살린다(행 9:36절 이하). 바울은 다락방에서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린다(행 20:7절 이하).
고대인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늘 우리와는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였다. 과학적인 것을 엄정한 것으로 보는 우리의 눈에 그들의 것은 모호한 것으로 비친다. 그들의 시각을 미숙한 것이라고 무시할 필요는 없다. 소생 전승을 전하는 성서기자들은 그런 관점으로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을 들여야 본 것이다. 그들은 오늘 우리보다 영적으로 훨씬 성숙한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