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4일
헤로디아
지난 설교의 제목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었다. 이 제목이 많은 걸 암시한다. 굳이 내 설교를 다 듣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나보다 더 깊이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 자체만 놓고 말한다면 그것이 예수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난다. 나도 그런 구도로 설교를 풀어나갔다. 이런 기본 구도를 충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야기의 앞뒤, 좌우에 얽힌 사연들을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몇 항목만 짚겠다. 첫 항목은 헤로디아다.
마가복음 기자는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겼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 기자는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누가복음 기자는 헤로디아에 대한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가복음과 다른 문헌(Q 자료라 함)을 토대로 해서 기록되었다.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가 가장 빠르다는 것은 그 보도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원래 사건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복음서들이 자료로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각각 자신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과 배제의 방식으로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 사건의 역사적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헤로디아까지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꾼의 기질이 보인다. 복음서 중에서 역사적 근거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복음서는 물로 누가복음이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 건에서만은 마가복음이 더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을 원수로 여긴 헤로디아의 기분이 이해가 된다. 그는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헤롯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 안티바스와 재혼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빌립과 헤어졌을지도 모르고, 거꾸로 빌립에게서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할 우여곡절이 거기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지 이혼과 재혼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안고 사는 헤로디아의 마음은 늘 조마조마하지 않았겠는가. 왕비로서 공식행사에 나서면 뒤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뻔뻔스러운 사람은 그것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와중에 요한의 공개적인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헤로디아의 심정이 어땠을지 이해가 간다. 그녀에게 오히려 연민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래도 악은 악이다.
목사님의 글에서 성경의 이면을 읽는 탁월함이 느껴집니다.
마리아발도르따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시> 총 10권
한 수녀가 현현중에(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당시의 상황을
받아적은 책인데, 천주교에서는 이미 필독서 수준인 책이지요.
목사님의 글을 따라가다보니 마치 그 책을 읽고 있는것 처럼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