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4일
소명에 대해
지난 21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던 박영선 목사와의 설교 대담 중에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설교자의 소명이다. 소명에 대해서는 작년에 ‘목사공부’를 연재하면서 어느 정도는 짚었다.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당일 말하면서 어떤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부름을 받는다는 건 위험한 사건이다. 부름을 받으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부르는 대상이 사이비일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따라나선 독일 사람들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목사들도 소명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소명이 옳은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사실 소명의 객관적인 기준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소명 자체가 양면성이 있고, 시간적으로 제한받기 때문이다. 처음의 소명은 건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소명을 꾸준하게 성찰하는 게 최선이다. 다행스럽게도 성찰의 근거들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충분하게 주어졌다. 신학이 그것이다. 목사로서의 소명과 설교자로서의 소명이 신학적 성찰에 의해서 바른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소명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더 근본적으로는 소명 경험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게 문제다. 그게 뭔지도 모른다. 마치 시인에게 ‘언어가 말을 건다.’는 경험이 없다는 거와 비슷하다. 이런 상태에 이른 시인들은 절필하지만 목사는 그럴 수가 없어서 그 운명이 더 비참한 것이다.
소명은 목사와 설교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소명이 없는 기독교인이 태반일 것이다. 하나님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존재의 기쁨을 모른 채 상투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가장 깊은 생명으로부터의 소리를 우리는 들어본 적이 있을까? 이렇게 도사처럼 말하는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