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바람이 분다 1>
미야자키의 <바람이 분다>를 두 번에 나눠서 봤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비판적인 움직임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타당한 비판이 아니다. 그런 시각이라면 비판받지 않을 철학자, 예술가, 신학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요즘처럼 내가 한 감독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이런데 마음과 시간을 쓸 정도로 삶의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이런 데 대한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내가 철이 드는 걸까?
<바람이 분다>를 보는 동안 나의 신학적 상상력이 훨씬 풍성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이라는 이미지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바람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왜 그런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리라. 그걸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하기가 좀 곤란하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불교 정서에 가까웠던 서정주 시인마저도 노래하지 않았는가.
다른 글에서 몇 번 자랑삼아 말했지만, 우리 집 둘레에 대나무가 많다. 대나무는 바람의 나무다. 속이 비었다는 건 거기에 바람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지금도(오후 4시25분) 바람에 오만가지 모양으로 흔들리는 대나무가 내 서재 창문 너머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 어떤 발레리나가 저걸 따라갈 수 있으랴. 나무와 바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손으로 붙들 수 없는 바람, 제 멋대로 와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바람, 부드러우면서도 폭력적인 바람, 모양도 없고 무게도 없지만 가장 완벽한 현실성(reality)으로 존재하는 바람, 그 ‘바람이 분다’고 미야자키는 노래한다. 그가 깨달은 그 바람은 성경이 말하는 영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와, 정말 멋진 휴가를 보내고 계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쪼금이요.
저는 오늘 늦은 오후에 우리집 뒷산을 좀 돌아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이번 주일 교회에 오면 알게 될 겁니다.
돌아다니다가 작업복이 빨래 한 것처럼 다 젖었어요.
그래도 무지하게 많이 산을 쏘다니던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좋았습니다.
휴가 가서도 플라톤 이야기를 읽다니
참 대단하시군요.
그런 책들이 돈벌이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겠지만
삶의 중심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지요.
이런 책을 손에 들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정년 하고 노후를 보내는데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 지구에서 숨을 거둘 바로 그 순간까지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면서
믿음의 길을 잘 가봅시다.
나그네처럼, 소풍 나온 아이처럼,
바람처럼, 꽃과 나무처럼,
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