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8일
양자택일
제자들 여럿이 떠난 뒤에 예수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곁을 떠날 거냐, 요즘 식으로 바꿔서 교회에 나오지 않을 거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이미 설교에서 한번 짚었지만 이 질문은 생명과 죽음, 또는 생명과 생명 아닌 것, 또는 생명과 사이비 생명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소리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글자라고 해서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귀가 있다고 들을 수 있거나 눈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감동적으로 듣는데 자기만 못 듣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다른 사람들은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는데 자기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다른 이들은 생명 선택이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하는데 자기만 멀뚱하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양자택일이라는 단어가 너무 과격하고 독선적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구호처럼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만 선하다는 게 아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리킨다. 그 절대 세계는 무조건적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게 아니라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오직 그것만 좋은 것이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은 바로 예수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