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하나님 경험과 언어의 한계
어제 묵상에 이어지는 이야기다. 하나님 경험은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이다. 그걸 절대 생명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아니면 궁극적 실체라고 해야 할지,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대상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대답이 될 수 있는 근원이다. 그런데 인간 언어는 늘 제한적이다. ‘오늘 바람이 분다.’는 말이 있다 하자. 바람이 부는 사실을 가리키는 건지, 바람이 불어서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를 저 말만 갖고는 모른다.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작업이 철학이다. 화이트헤드는 ‘리얼리티는 과정이다.’는 명제를 세웠다. 데카르트는 ‘나는 사유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했고,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이라고 이전의 철학을 싸잡아 비판했다. 지금도 온갖 종류의 철학자들이 세상의 궁극을 해명하려고 말을 만들어낸다. 세상의 궁극에 대한 해명은 포기한 채 부분적인 현상에 빠져버리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불립문자의 한계 상황에서 인간은 산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자. 우리는 유한과 무한이라는 단어를 쓴다. 낱말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게 무언지는 감이 오지 않는다. 무한이 뭘까? 한계가 없는 걸 무한이라고 알 뿐이지 무한 자체를 아는 건 아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있는 존재’인 하나님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며, 성경의 한 부분인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라는 호칭도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이라는 신앙적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궁극적인 근원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생명의 근원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진정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술어에 갇히지 않는, '궁극적 실체'이시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