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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죄, 그리고 은총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 이전에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를 주도하던 이들이 모두 유대교의 율법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과 비슷한 종교적 배경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율법주의 전통에 강력히 반기를 들었다. 이에 해당되는 한 구절이 롬 4:15절이다. 공동번역으로 소개한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4:15)

폭탄 발언이다. 법이 있는 한 인간은 법을 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조심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법이 없어야만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법이 없는 세계야말로 구원의 세계라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갓난아이들이나 지능이 크게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법 인식이 없어서 죄도 없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라면서 온갖 종류의 법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과 비례해서 죄도 자란다. 그게 율법의 속성이며 근본적인 한계다.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법이 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일단은 몸과 영혼의 삶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몸은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교통신호도 지켜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한다. 영혼은 율법이 아니라 은총의 세계에 속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에 영혼이 집중할 수 있다면 그는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몸까지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법의 질서에 속한 삶의 영역을 줄이는 게 최선이다. 이게 세속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법과 은총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게 기독교인의 운명이다. 은총의 빛이 더 빛나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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