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8일
야고보와 바울
야고보서는 4세기까지 신약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기독교 집필자들의 문헌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야고보서가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정경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어떤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내용은 둘째 치고 저자가 예수의 동생 야고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야고보서의 저자는 누군지 모른다. 저자 문제는 너무 복잡하니까 여기서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겠다.
행위가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주장은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바울과 대척점에 선 것으로 보인다. 설교 중에서 짚었지만 만약 그렇게 본다면 야고보는 복음의 중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그건 아닐 것이다. 바울을 주요 비판의 대상을 여겼다기보다는 바울 신학은 더 극단적으로 적용시키는 일단의 기독교인들을 주요 비판의 대상을 여겼다고 보는 게 옳다. 이들은 믿는다는 말을 앞세운 채 삶에서는 무책임했다.
야고보의 비판이 옳기는 하지만 그것을 일반화시키면 곤란하다. 행위가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했으니 기독교인들은 책임 있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입장이 오늘 한국교회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다. 하나는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을 추종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사회변혁을 복음의 본질로 여긴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성화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개인의 도덕적 변화를 복음의 본질로 여긴다. 이 두 입장이 신앙적으로는 진보와 보수로 크게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똑같다. 전자는 사회적인 차원을, 후자는 개인적인 차원을 강조할 뿐이지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야고보는 아주 구체적인 상황의 한 부분에서만 옳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만 옳은 이야기를 일반화 하면 왜곡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그 대목을 지난 설교에서 짚으려고 했는데, 전달이 잘 됐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