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
빈말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을 밥상머리에서 마치 반찬을 먹듯이 조금씩 읽고 있다. 235쪽까지 읽었다. 얻어들은 게 많다. 최근에 읽은 것 중에 몇 대목을 삼일에 걸쳐 소개할까 한다. 하이데거가 언어에 천착하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을 정도니, 더 설명해 무엇하랴.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창세기 진술이나 태초에 말씀에 계셨다는 요한복음의 진술도 이런 무게를 지니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말이 존재를 드러낸다고 본다. 현존재인 인간만이 말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존재가 드러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런 말만이 아니라 빈말도 있다. 존재의 드러남이 아니라 상투적인 말이다. 박찬국 교수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이렇게 설명한다.
빈말은 우리가 존재자를 진정으로 발견하는 것을 막는다. 빈말은 빈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새로운 물음과의 대결을 방해한다. 현존재는 우선 일상적인 해석 속에서 성장하며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진정한 이해, 해석, 전달, 재발견 및 새로운 취득은 이러한 일상적인 해석 안에서 그것과 대항하여 수행된다. 공공적인 해석은 기분에 젖는 가능성들까지도, 즉 현존재에게 세계가 와 닿는 근본양식들까지도 이미 결정하고 있다. 세상 사람은 심정성을 미리 규정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규정한다(233쪽).
설명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전(前)이해를 필요로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가지만 보자. 빈말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정도의 말을 가리킨다.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말들이 빈말이다. 그게 아무리 권위 있는 말이라고 해도 빈말이다. 재판관의 판결문도 대개는 빈말이다. 목사의 설교도, 대통령의 말도 대부분은 빈말이다. ‘새로운 물음과의 대결’을 방해하고 있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빈말에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런 빈말이 권위를 떨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詩)적이지 않은 말들은 다 빈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목사님이 좋아하실 것 같네요.^^
이미 보셨을 수도 있지만.
박찬국 교수님 하이데거 강연입니다.
http://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79145&rid=2890&lectureType=classic
황홀한 고백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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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런닝구
경산 부림초 배한권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려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하나는 이해인 수녀의 시고, 또 하나는 초등학생이 쓴 신데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초등학생의 시가 더 좋아요. 이해인의 시는 아름답게 꾸민 말로 가득 차 있고 너무나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수님 말씀처럼 빈말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반대로 초등학생의 시는 꾸밈이 없고 구체적이라고 생각해요. 이해인의 시처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지만, 시 속에 가족의 사랑과 엄마의 검소함이 담겨져 있고요. 예수께서 천국은 어린이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빈말이 없고 진실하니까요. 이런 게 시적인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