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
'시적인 것'에 대한 탐색
연탄재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안도현은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로 유명하다. 그가 2008년 5월부터 11월까지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어 2009년에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부제는 ‘안도현의 시작법’이다. 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눈여겨 본 글이다. 나는 설교나 영성에 대한 특강을 할 때마다 이 책을 소개한다. 지난 9월14일의 특강에서도 창조적인 설교를 할 목사들에게 필독서라고 소개했다. 머리말의 첫 단락과 둘째 단락을 인용하겠다.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으므로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하는 것으로 소임의 일부를 다하고자 한다. ‘시적인 것’의 탐색이야말로 시로 들어가는 가장 이상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담론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시의 성채를 위해 ‘시적인 것’을 반죽하거나 구부러뜨릴 수도 있다. 이 책은 내 누추한 시 창작 강의노트 속의 ‘시적인 것’을 추려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만큼 시인이 많은 나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수천 명의 시인이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의 나라라면 적어도 시적인 일들이 곳곳에 넘쳐나야 마땅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비시적인 생각과 행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며 움직이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인이 되는 일을 단순히 개인적 명예와 욕망을 채우는 장신구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은 왜 또 그렇게 많을까? 혹시 글 쓰는 자의 태도에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글에서 시를 하나님으로, 시인을 설교자인 목사로 바꿔 읽어보라. 하나님을 ‘허공의 깊이’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읽을 준비가 안 된 사람이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경험했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했으나 얼굴을 못 보고 등만 보았다고 한다. 시인도 시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보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말해야 할 목사에게는 더 말해 무엇하랴. 시인이 많은 나라에서 시적인 일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안도현의 한탄처럼 목사와 교회가 많은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날만한 일들을 찾아보기 힘든 건 무슨 이유일까? 이 글에서 말하는 시적인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