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9일
지옥
지난 설교 본문에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손과 발과 눈이 죄를 범했을 경우에 그걸 제거하는 것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이런 말은 교육받은 현대인들의 머리에 잘 와 닿지 않는다. 위협적으로 들리고, 유치하게 들린다. 더구나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말에 이르면 고개를 완전히 좌우로 흔들 사람들도 많다.
반면에 지옥으로 인해서 죽음 이후가 불안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심하게 불안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막연하게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자들의 이런 불안감을 이용해서 위협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다. 죽지 않는 구더기 속에 뒹굴게 될 것이며,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고통당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우주 공간 어디에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방식의, 즉 구더기와 불에 의해 고통당할 수 있는 방식의 지옥은 없다. 죽으면 실제로 우리 몸을 구더기가 먹을 것이며, 우리 몸이 불에 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죽은 다음에는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는 단절된 상태니까 두려워할 거는 없다. 지금이라도 머리카락을 불에 태워보라. 불길의 고통이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 뒤의 지옥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있다면 자기는 지옥을 택하겠다는 루터의 말이 공연한 게 아니다.
지옥은 있다거나 없다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없고 천국의 반대개념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천국이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라면 지옥은 절대적인 죽음의 세계다. 천국은 희망이 가득한 세계라면 지옥은 절망이 가득한 세계다. 천국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세계라면 지옥은 그 대면으로부터 제외되는 세계다. 전자가 사랑의 세계라면 후자는 사랑이 없는 세계다.
이런 설명을 애매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그런 지옥이 있다는 말인지 아니라는 말인지 확실하게 말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걸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죽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지옥 표상은 두 가지 명제 사이에 놓여 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심판이 실행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형벌을 가리키는 지옥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개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지옥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옥을 영원히 비워두신다.
C. S. 루이스는 지옥을
안쪽에만 열쇠 구멍이 있는 방에서
스스로 문을 잠구고 혼자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정확한 문장은 아닙니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을 닫아버리지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