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의로움과 양심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할 때 우리는 주로 양심을 문제로 삼는다. 양심적인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본다. 착한 일을 할 때는 양심이 떳떳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착한 일과 부끄러운 일은 세상의 도덕규범이나 실정법 등을 가리킨다. 종교적으로는 율법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서 그런 도덕규범과 법을 지킨다. 하이데거는 양심 문제를 좀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본다. 박찬국 교수의 설명을 인용하겠다.
이렇게 양심의 부름이 현존재를 책임 있음으로 불러 세운다는 것은 현존재를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성을 향해 앞으로 불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비단 어떤 과실을 범했기 때문에 어떤 책임을 자기에게 지우는 것만은 아니다. 현존재는 마음씀을 존재로 갖는 존재자로서 이미 책임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양심의 불러냄을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에 있어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 즉 가장 고유한 본래적으로 ‘책임 있게 될 수 있음’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것과 같다(하이데거의 ‘존재와 사유’ 강독, 372쪽).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단순히 어떤 행위에 대한 반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가능성으로 불러내는 힘이다. 양심을 통해서 가장 본래적인 실존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을 놓치고 세상의 도덕규범과 평판에서만 양심을 이해하는 건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으로부터 퇴각하는 태도이다. 양심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본래적이고 실존적인 존재가능성이다. 그리고 거기서만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깊이를 알고, 높이 보며, 멀리 가는 삶의 지경을 소망합니다.
책임감을 다시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