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8일
시(視)와 견(見)
지난 설교에서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다는 것을 단순히 육체적인 눈이 뜨인 것만으로 보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것의 종교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문제를 동양의 가르침인 시(視)와 견(見) 개념으로 보충하겠다.
시와 견은 똑같이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념적으로는 크게 다르다. 시는 말 그대로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체의 눈이 절대적이다. 망원경과 현미경도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대상을 더 잘 보게 해준다. 눈으로 뭔가를 본다고 해서 근원적인 것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보는 건 피상적인 거다. 모든 동물들에게도 있는 능력이 바로 시다.
견은 사물을 깨닫는 것이다. 대상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그 대상과 일치되는 차원에서의 봄이다. 고은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해인가 동료 문인들과 함께 서정주 선생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날따라 아랫목에 앉아 있는 서정주 선생이 낯설게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 저런 자세로 저기에 앉아있는 저 늙은이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을 그치시게나, 하는 선생의 충고를 들어도 웃음이 그치지 않자 서정주 선생이 크게 역정을 냈고, 그 이후로는 그 집을 출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존재’의 신비를 본 것이다. 국악에서도 득음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단계에 들어가면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본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시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견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는 구분이 잘 안 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게 다르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시(視)한 사람이 아니라 견(見)한 사람이다.
ㅎㅎ
고승 앞에서 제자가 던지는 질문 같군요.
내가 고승이 되지 못하여
그냥 정보 차원에서 답합니다.
이렇게 정보로 아는 걸 시라고 하고,
앎과 삶의 일치를 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 어느 부자 청년 등은
시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은 견의 차원으로 들어간 거지요.
불교 선종에 見性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들은 교종의 교리공부 방식이 아니라
참선의 마음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 방식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신학공부보다는
기도를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는 주장과 비슷하지요.
그게 바로 견성이에요.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비슷한 뜻입니다.
불교에서 교종전통과 선종전통이 다 중요하다면,
기독교에서도 신학공부(신학대학)와 경건생활(수도원)이 다 중요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가르침의 중심세계 안으로
다이빙 선수가 매끄럽게 입수하듯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자유, 해방, 평화 등등으로 묘사될 수 있는
구원을 경험하는 거지요.
다 아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했군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시와 견의 차이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시와 견을 늘 오락가락하며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견에 들어 간것 같았는데 다시 시로 나와 한참을 헤매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견(見)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