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1일
비텐베르크
1517년 10월31일은 마틴 루터가 95개 항목의 신학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내다 걸은 날로 알려져 있다. 대자보를 만들어 붙였다는 말이 되는데, 분량으로 볼 때 실제로 그걸 붙이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도 정확한 거는 모른다. 아래 사진은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이다.
당시에는 가톨릭 성당이었지만 종교개혁 운동을 거치면서 교회당으로 바뀌었다. 성당이었다가 교회당으로 바뀐 건물이 독일에는 제법 된다. 베를린에서 가장 큰 고딕식 교회당도 그렇다. 가톨릭을 따르는 영주들과 프로테스탄트를 따르는 영주들 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 일반 주민들의 신앙은 영주의 신앙을 따르는 걸로 결정되었다. 개신교 영주가 있는 지역의 가톨릭 성당은 모두 개신교 교회당이 되었다. 이런 전통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를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의 중북부는 개신교회가 많고, 남부는 가톨릭이 강하다.
95개 신학 명제가 종교개혁의 불씨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담은 소책자가 마침 활용되기 시작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덕분으로 대량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배포되었다. 이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담고 있다. 하나는 면죄부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 무오설이다. 로마가톨릭이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판매하게 된 이유는 당시 건축 중인 바티칸 베드로 성당의 부족한 자금 모금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황무오설도 처음으로 확고했던 것은 아니다. 서로마 지역에서만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고, 동로마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대주교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로마가톨릭과 정교회로 이어진다. 어쨌든지 루터는 당시 바티칸의 교황을 비롯해서 고위 성직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비판을 강한 톤으로 했다. 면죄부 판매는 아무런 성서적 근거가 없는 불신앙 행위이고, 교황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는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글도 잘 썼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과 신학교 강의실에서 꾸준하게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했다. 아래 사진은 비텐베르크 교회당 내부 모습이다.
우리가 볼 때 오른 편 아래 벽에 붙어 있는 설교단이 보일 것이다. 설교단 바로 위로는 고깔모자처럼 생긴 지붕이 있다. 옛날에는 엠프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예배나 미사를 드릴 때는 성직자가 제단 근처에 자리하다가 설교나 강론을 할 때는 회중석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설교단으로 올라간다. 5백 년 전 루터가 설교한 설교단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게 기특하다. 이제 2년만 지나면 종교개혁 5백주년이 된다.
제작년엔가 소개해 주셨던 루터-하나님과 악마사이의 인간,이라는 책을
(-끝까지는 못읽었지만 ) 읽어놓으니 루터의 자취를 따라 여행하고픈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