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
퇴락
내가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주로 책을 본다. 주간지를 볼 때도 있지만 요즘은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을 읽는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다보니 속도는 나지 않는다. 앞에서 나는 여러 번에 걸쳐 그 책의 내용을 이 코너에서 소개했다. 오늘도 한 구절을 더 인용하겠다.
‘세계’ 안에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것들에 몰입하여 퇴락해 있는 존재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자기 해석을 규정하면서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를 은폐한다. 따라서 그것은 현존재에 대한 진정한 존재론에 적합한 지반을 제공할 수 없다. 따라서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해명은 ‘퇴락해 있는 존재적, 존재론적 해석 경향’과 대결하면서 탈취되어야만 한다(400쪽).
하이데거의 글이나 그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일단 용어에 막혀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위 글도 마찬가지다. 용어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전체적인 흐름만 따라가는 게 좋겠다.
첫 문장에서 ‘퇴락해 있는 존재’와 ‘본래적 존재’가 대비된다. 현존재인 인간이 일상적인 것에 매몰되어서 결국 자기의 본래적 모습을 잃을 수 있다는 의미로 그걸 대비시켰다. 연봉, 친구, 취미생활, 티브이 시청 등등을 통해서만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퇴락인데, 기독교 용어로 바꾸는 죄다. 죄는 세상에서 자기를 확대하려는 열망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하이데거 식으로 바꾸면 ‘본래적 존재’가 은폐된다. 대개 사람들은 그런 퇴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는 영적인 만족감을 경험하지 못한다.
같은 저자의 아주 얇은 '존재와 시간 읽기' 라는 소개서가 있습니다.
먼지가 쌓여가는 존재와 시간이 너무 두꺼워,
가볍게 읽고 본서에 접근하려다 목사님처럼 용어가 막히고 개념도 생소해서,
그 얇은 소개서를 몇번 읽기도 하고, 또 한바닥 읽는데 몇일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지만요 ㅎㅎ
그런데, 제 경험상 큰 맥락에서 은폐된 '본래적 존재' 를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 외에는, 쉽게말해 '예수'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 이라고 말한 지점도 저는 이런의미와 상관해서 이해합니다.
반면, 비본래적인 존재방식을 벗어나기는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 '적' 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그것들은 정체도 없고, 운산하고 있다보면 아무데에도 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런 까닭에 니체는 사자가 되어서 '고마 다 때려뿌셔삐라 마~' 라고 한것이겠죠.
성공, 좋은차, 좋은 집에 자식은 전교1등해서 좋아하는 삶을
니체는 수동적이고 노예적인 것으로 보았으니,
분명 퇴락한 존재양식들을 비웃은 걸테죠.
그러나, 니체는 너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나가다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버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하이데거 지적한 '존재 망각' 이 문제가 아니였나 싶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서는 뭔가 존재와 신의 유비(?) 는 보았지만,
진짜 예수와 복음이 없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실존의 불안앞에서 신으로 도피했다는,
키르케고르의 '신앞에선 단독자' 만이 유일한 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세,
목사님 설교에서처럼 하나님앞에서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만이 답이라고 봅니다.
하이데거의 퇴락한 삶은 앞서 키르케고르가 지적했던, 안전하고 시시하게 변질되버린 삶이겠죠.
존재 곧 하나님으로부터 넘어오는 폭발적이고 넘치는 생명력은 없고,
온갖 보험권유로 가득한 삶 ....
또 그러나, 현실은 ,,,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김훈-
위 김훈님의 산문처럼 지겨운 밥벌이의 연속일테지만 ..
그래도, 오늘 아침 햇볕은 눈부셨습니다. ㅎㅎㅎ
나는 오직 예수안에서만,
두려움없는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find, and shall find me, unafra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