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
불안과 기쁨
하이데거 이야기를 한 번 더 하자. 어제 인용한 그 책에서 한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겠다. 399쪽 중간에 나오는 글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를 모든 망상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행위’의 결의성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선구적 결의성은 현존재의 현사실성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적 요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현존재의 현사실적 근본 가능성을 냉철하게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현존재를 단독자화된 존재가능성 앞에 직면하게 하는 냉철한 불안에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기쁨이 수반된다. 이러한 기쁨 속에서 현존재는 분망한 호기심이 세간사로부터 제공하는 향락의 ‘우연성들’로부터 해방된다.
앞에서 짚은 말이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만이 그렇게 말하는 거는 아니지만 그는 이 사실을 철학의 기본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별나다. 기독교 신학도 역시 죄와 죽음을 기본 토대로 삼는다. 죽음에 직면할 때 인간은 본래적인 실존을 살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게 바로 양심이다. 바울은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칫 현실을 무시하고 저 나라에만 관심을 둘 수 있다. 하늘의 계시를 듣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이데거는 그게 아니라 인간이 놓여 있는 운명을 냉철하게 뚫어볼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 운명은 인간이 결국 ‘혼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운명 앞에서 인간은 불안해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런 불안에는 기쁨이 수반된다고 한다. 역설적이다. 옳은가? 내가 보기에 그의 주장은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경험은 세상 모든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단절을 전제하는 것이라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거기서 오는 모든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기쁨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글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는 기독교 신학과 아주 유사한 철학을 전개한다. 고독의 불안이 기쁨이라는 말은 기독교 문헌에서 흔하게 나온다. 키에르케고르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심지어 바르트 등도 마찬가지다. 하이데거 철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2천년 기독교 신학을 보편적 언어로 해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아는 한에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단독자로서의 경험도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신앞에 선 단독자가 되려고 노력할 뿐이고,
그럴 때 하나님은 세상과 단절시키고 신앞에 혼자 설수 있는 마음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드리는자에게 열린다는 말씀이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언제나 양심의 소리라는 존재의 부름이 먼저있었겠죠.
'인간의 하나님' 이 '하나님의 인간' 을 향한 부름...
칼바르트의 개신교신학입문이라는 책에서 위의 '인간의 하나님', '하나님의 인간' 이라는
저 표현을 보고 얼마나 먹먹했는지 ...
근데,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을 제대로 본적이 없지만,
떠도는 여러 글들을 보건데, 존재 대신에 하나님을 넣으면
거의 그대로 신학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ㅎㅎㅎ
http://blog.ohmynews.com/happy4/9494
위링크는 아래 댓글에서 '밥벌이의 지겨움' 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온 글입니다.
글을 읽다 보면, 공감도 많이 되고 씁쓸 쌉싸름하면서 그렇네요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