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4)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소유는 두 렙돈이 다였다. 그것으로 한 끼니나 두 끼니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 혼자서, 또는 자식과 함께 말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우리는 대충 짐작한 할 뿐이지 충분히는 모른다. 아프리카의 몇몇 가난한 나라, 내전으로 먹을 게 없는 나라 사람들이 이런 처지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정확하게 우리 인생을 들여다본다면 우리 역시 두 렙돈밖에 없는 저 과부의 운명과 다를 게 없다. 설교에서 이미 암시된 거지만, 실제로 수천만 원, 수억 원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무한정 늘릴 수가 없다. 곧 하루나 이틀밖에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에 흔한 말로 억만장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은 빈손으로 가야한다. 모두 똑같은 운명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 순간을 생생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있고, 의식하지 않(못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실존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뚫어보는 게 필요하다. 여기서 예외가 없다. 그걸 외면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나, 그게 다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연대하는 것이다. 그런 연대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가난한 그 실존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게 두려워 외면하려는 데에 있다.
예, 은나라 님,
인간의 삶 자체가 실존적으로 가난하다는 말은
영적인 차원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물론 그걸 인식하려면 영적 시각이 필요하긴 합니다.
100억의 자산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밥을 하루에 열끼를 먹을 수 없고,
그 돈을 다 투자해도 수명을 20년 늘릴 수가 없고,
그것으로 참된 평화를 얻을 수도 없어요.
가난한 거지요.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 전까지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나도 잘 모릅니다.
그냥 대충 따라가는 거지요.
근데 따지고 보면
부활과 하나님 나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평화없음을 가난하다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죠! 이세상의 그 어떤것으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평안은 얻을순 없죠..
가시적인것이 아무리 평화롭게 보이고.. 우리를 아무부족함이 없게 해줄것처럼 보여도 그건 거짓인거죠..
이제 알겠어요.. 우리가 체험한것이 꼭 진리가 아닐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님 안에서 참평안을 맛보았음에도 자꾸만 눈에 보이는것을 잡으려고 애쓰는 내삶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하마터면 목사님의 마지막 말씀을 그냥 넘길뻔했는데요..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버텨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연대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좀더 생각을 해봐야 겠네요..
목사님..
"인간의 삶 자체가 실존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뚫어보는게 필요하다. 여기서 예외는 없다."
란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영적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ㅡ존재 는 좀 이해하기 어려워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