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4일
대림절(5)
설교에서 생명완성이 인간실존과 인간다움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인간다움이라는 말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휴머니즘과 비슷한 어떤 것쯤으로 말이다. 보통 그렇게 말한다. 사람이 좀 인간다워야지, 기독교인들은 인간다움이 부족해. 이런 점에서 인간다움은 고리타분한 신앙생활과 달리 인간미 넘치는 삶의 태도로 이해된다.
인간실존, 또는 인간다움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 비록 그것이 기독교와 다르거나 더 나가서 기독교를 거부하는, 쇼펜아워나 니체 식의 인간다움이라고 하더라도 놓쳐서는 안 될 요소다. 기독교의 인간이해가 본질을 찾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공허한 주장에 떨어질 염려가 없지 않다. 이런 기독교는 18-19세기에 많은 공격을 받았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그런 눈높이의 인간이해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는 더 심하게 공격을 받는 게 좋다.
설교에서 언급된 인간다움은 더 본질적인 것이다. 창세기가 말하는 그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 성서의 창조 전승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을 단순히 신의 피조물로 깎아내리고, 또 죄인으로 매도한다고 말이다. 이런 성서의 관점에 따르면 결국 인간의 삶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그건 오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의 존엄을 바탕에 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결국 신과 소통될 가능성이 인간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인간다움의 장소다. 예수 재림으로 완성될 인간다움은 인간다움의 가장 깊은 차원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이다.
포항에 있지요?
많은 질문을 하셨는데,
그런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인간, 역사, 세상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어서
어느 누구도 결정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고,
최선의 대답은 다시 질문의 세계로 이끄는 겁니다.
관념화의 어려움에 대해서만 콤멘트 합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 문장을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말하는 도는 분명히 관념적이지만
아주 리얼(real)한 겁니다.
관념이나 실증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리얼하냐가 문제에요.
이를 위해서 총체적인 앎이 필요한 거지요.
예컨데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이도서나 (질료와) 형상,
하이데거의 존재 등등의 개념과 더불어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와 인간 이해를
총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완전한 대답을 알지 못하고,
가까이 가고 있을 뿐이에요.
신앙적으로만 말하면
예수의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림절 둘째 주일의 기쁨이...
목사님 잘계시지요? 영신대원3학년으로 일전에 찾아뵈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말 동의되는 부분이며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
생각도 됩니다.
더 깊이 질문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 세계에서의 형상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구체적이고 손에 잡힐 수 있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학교 수업중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다움이 가장 깊은 차원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말할 수 있고 그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 관계하는 것으로 비슷할 수 있을지..?
늘 이부분이 관념화 되어서 뜬 구름 잡는 식으로 결론이 되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