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8일
종말의 능력
지난 설교의 제목에 나오는 ‘종말의 능력’이라는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이기 때문이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어려운 말도 아니다. 종말은 마지막을 가리키고, 능력은 힘을 가리킨다. 이런 낱말 뜻의 차원이 아니라 개념의 차원에서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종말을 말한다는 것은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지금의 모든 것을 과정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지금의 모든 것들이 미완이면서 잠정적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보자.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 죽는다. 지금 20세인 청년에게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이 완성된 게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크게 보면 국가도 그렇고 인류도 그렇다. 종말에 가서 그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지금은 부분적으로, 거울로 보는 것처럼 알지만 종말이 오면 전체적으로,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를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종말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기독교를 재림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도 세상이 종말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예수 재림으로 세상이 완성되며, 거꾸로 세상 완성이 곧 예수 재림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을 빼면 모든 것이 허물어질 정도로 종말 사상은 중요하다. 이걸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삶의 능력으로 받아들여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말하려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지요.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스피노자가 했던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의 성격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종말은 필연이며, 그 필연 속에서도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이 있는 이들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볼 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