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4일
생명, 최초의 30억년(2)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손꼽히는 존 아치볼드 휠러는 우리가 무지의 바다에 뜬 섬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비유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불러일으킨다. 지식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건설된 그 섬이 조금씩 커질 때, 이에 따라 해안선-지식과 무지의 경계-도 따라서 늘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아직 생명의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아마 우리의 손자손녀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나면 과학 하는 흥미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학책은 과학이 증명된 사실의 집합체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 과학은 모르는 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이다(14쪽).
앤드류 놀은 과학을 ‘질문하는 방법’으로 정의한다. 옳다. 하나의 현상을 알게 되면 그 다음 단계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놀의 책도 해명과 질문을 반복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학문의 중심에는 질문이 놓여 있다. 철학은 만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다. 삶이 무엇인지, 시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믿음을 말하는 신앙도 역시 그 중심에는 질문이 놓여 있다. 요즘 대구샘터교회에서 수요일에 공부하는 <욥기>는 죄가 없는 이들에게 임하는 재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주제로 하는 책이다. 예수도 역시 하나님을 향해서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질문했다. 이런 질문은 믿음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토대를 확실하게 한다. 그런 질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우선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알아야 질문하고, 질문을 할 줄 알아야 진리를 경험하게 되고, 진지를 경험해야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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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그렇기도 하네요.
그럼에도 제가 좀더 방점을 찍고 싶은 건 욕망입니다.
영화 '내부자들' 에서 미래차 회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식욕, 명예욕, 성욕, 이런 욕망들을 놓아버리면 폭삭 늙어버린다고 ...
너무나 옳고 또 옳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큰 함정에 빠졌던 것 중에 하나는,
이런 욕망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면서 살았던 점입니다.
또한, 식욕은 괜찮은데 성욕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성도착증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라,
욕망의 순수성의 차원에서 모든 욕망을 편견없이 긍정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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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예속적인 욕망이 동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예처럼 세상과 사회가 던져주는 데로 욕망하고 주어진 가치대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욕망을 가지는게 동굴에서 나오는 거겠죠 ...
말씀하신대로 성령의 일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런 표현만으로는, 조금 죄송스럽지만 너무 고상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식욕, 명예욕, 성욕 등을 충분히 긍정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를 추구할 수 있다고 저는 보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로는 성경의 다윗이 아닐까 .... 제맘대로 생각해봅니다. ㅎㅎ )
여기에서, 선악의 구도는 망상이라 보고요 ...
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악, 그 윤리학이 하나님 앞에서 가당키나 한지,
욥기에서 선한자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악은 인간 선악의 윤리학도 넘어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생각에 '생' 의 다른말은 욕망이라고 봅니다.....
그 욕망을 보는 '나' 는 또 다른 얘기이고요 ..
원초적 욕망이 학문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스테이트루 님의 말은
더 보탤 것 없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살기 위해서 엄마 젖을 빠는 욕망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는 거지요.
식욕과 성욕도 다 기본적으로는 거룩한 겁니다.
기독교 금욕주의를 비판한 유럽의 모든 생철학이
말하려는 것도 그런 거겠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니 거룩하달밖에요.
그게 파괴적으로 작동하느냐,
창조적으로 작동하느냐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더 생각해야 할 문제구요.
내가 동성애자들을 비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옆으로 많이 나갔군요.
질문과 대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가열하게 전개해야 할 이유는
삶의 본질, 스테이트루 님이 말하는 원초적 욕망에
충실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데에 있어요.
도(이는 기본적으로 공부인데)가 깊어지면 어린아이처럼 되잖아요.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원초적, 시원적 욕망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는 거구요.
어쨌든지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바르트 등등,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업적을 지푸라기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실제로 생각하려면
일단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겠지요.
강을 건넌 다음에는 배를 버려야 하지만,
그건 강을 건넌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배가 필요합니다.
공부 열심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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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있고 단순하게 욕망을 연료로 살고 있습니다.
창조적 욕망이든 예속적 욕망이든 요는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뭔가 있어보이고 어려운 많은 것들이 사실은 결국 단순한 욕망이 시작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무엇이든 욕망을 꿰뚫어 본다면 다 본 것이 아닌가라고요.
공부는 해야겠죠.
앎의 욕구가 있어 앞으로도 짬내서 공부할 생각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공부가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길은 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삶의 고통이 눈물이 슬픔이 여러경험들이 배가 되어 루터 바르트 등이 가리키는 곳으로 건너갈 수 있게다고요.
위 댓글에 그런 모든 것들이 거룩하다라고 말씀하신 건 댓글을 읽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극히 쌈마이 인생에 거룩하지도 못한데
거룩한척 하며 살아보려는 게 괴로웠거든요. ㅎㅎ
근데 보니 인간이 다 거기서 거기, 돈 지식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결국은 욕망따라 사는 거고 그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건데 .... 다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뭐 결국 흐르는 데로 먹고 자고 싸고 사랑하고 울고 화도내고 공부도 하고 그냥 지 생긴대로 지 복대로 살아가는거죠 ...
이런 걸 긍정할 때 집착을 좀 내려놓을 수 있고 그럴 때 좋으면 좋은대로 고우면 고운대로 저처럼 유치하면 유치한데로 사는거죠 ㅋㅋ
근데 거룩이나 생명, 이런 표현에 동의하는데 뭔가 더 끌어내리고 싶다는 욕구가 좀 듭니다 ㅋㅋㅋ 거룩하다는 개념이 자칫 경건하게 흐르면 .. ㅎㅎ
마지막으로 저야 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욥기강의와 사도신경해설을 보며 도움을 받습니다. 읽으면서 이런지식없이 어떻게 기독교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듭니다. 수천년 역사와 고문서를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의 이해는 쉽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길 역시ㅜ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어떤 지식이든지 그건 아무튼 욕망의 산출물이 아닌가요?
수만권의 책과 어마무시한 지식들은 모두 그저 인간이 욕망이 싸놓은 똥 이외에 무슨의미가 있는건가요.
집중해야 할건 누군가의 욕망의 산출물이 아니라 그 이면에 생동하는 욕망, 생명의 힘, 그런힘들이 흘러나오는 시원 ... 욥기가 가리키는는 곳도 그 생명의 시원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