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5일
바알숭배
어제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바알숭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거라는 뜻으로 설명했다. 이런 문제는 이스라엘의 역사 경험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신 26:5절에 거론되듯이 광야에서 ‘방랑하는’ 유목민으로 살았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다 유목민이다. 가인과 아벨 전승에서도 제사가 열납 되지 못한 가인은 농경민이고 열날 된 아벨은 유목민으로 나온다. 요셉의 도움으로 야곱 가족이 애굽에 들어가서도 고센 지역에서 소와 양을 치는 일을 했다. 광야 40년 생활은 유목생활의 절정이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삶은 생존 수준에서 더 올라갈 수 없었다.
이에 반해서 가나안 원주민들은 한곳에 정착한 농경생활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넉넉한 수준을 유지했다. 당시 가나안에는 철기 문명이 시작되어서 청동기에 머물렀던 광야의 이스라엘에 비해서 높은 문명을 구가했다. 철기 농기구 제작으로 농사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부가 축적되고, 그걸 바탕으로 예술이 발전되었다. 총체적으로 잘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했다.
부가 축적되고 문명이 발전하면 당연히 예술과 축제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가나안은 농사를 중심으로 한 축제가 많이 열렸다. 나중에 이스라엘도 그런 영향을 받았다. 유월절, 초막절 등등의 축제가 종교적 의미를 바탕에 두지만 농사 축제와도 연관된다. 가나안의 농사 축제는 삶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술, 먹을거리, 놀이, 춤, 스포츠, 섹스가 복합적으로 연결된다. 그런 것의 종교적 차원이 바알숭배다. 광야에서 겨우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 연명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명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을 빼앗기면 그들의 신인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자본주의를 신처럼 추종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