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2일
나의 하루살이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었다. 동네에 아이들이 없으니 쥐불놀이도 없다. 아이들이 있다 한들 요즘 아이들이 쥐불놀이를 하겠는가. 산불예방으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뛰노는 원당 마을을 상상하며 오늘 하루 내 삶의 동선을 스케치하겠다.
07:00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다.
07:10 이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린다. ‘마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마을회관에서 총회가 열리니 아침 드시고 9시30분까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포도박스, 복숭아박스, 고추박스 등, 과일채소 박스를 아직 신청하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까지 신청을 마쳐주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07:30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다. 층계를 내려가는 발이 여전히 불편하다. 지난 토요일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진찰받고, 3일치 약을 받아먹고 있는데, 회복 속도가 느리다. 소염제 1알, 진통제 1알, 소화제 1알 합계 세 알이 식사 후 한번 먹을 양이다. 고양이 밥을 주다. 나는 집사람이 택배로 구입한 ‘본죽’ 한통을 전자레인지에 1분30초 데워서 먹다. 과일도 조금 먹다. 커피는 생략하고, 혼자서, 편안하게...
08:00 약을 먹고, 컴퓨터 키고,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 확인하고, 인터넷 신문 제목 중심으로 훑어보고, 메일 확인하고...
08:30 마을 총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집사람을 깨우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는 표정이다가,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니, 최소한 일년에 한번 총회에는 부부가 꼭 참석해야 한다고 회유하다.
09:15 집사람과 함께 마을 회관으로 향하다. 발이 불편해서 천천히 걷다.
09:30 회관 도착. 마을 회관이라 해봐야 방 2개, 부엌 하나로 된 작은 집이다. 지난 늦가을에 집수리를 깨끗하게 했다. 처음에는 열 댓 사람, 시간이 지나면서 스물 댓 사람이 모였다. 왁자지껄...
10:10 정식으로 총회가 시작되다. 국기에 대한 경례, 바롯, 먼저 세상을 떠난 마을의 고인들을 추모하는 묵념, 바롯. 이장의 인사말과 재정보고, 사업계획과 기타 토의 등등. 이어서 경로회 보고와 부녀회 보고가 있었다.
11:00 회의가 끝나자 안주상이 들어왔다. 누른 돼지고기, 회무침, 감, 메밀묵 등등. 이때부터 점심을 먹을 때까지 소주, 먹걸리, 맥주를 기호에 따라 마시면서 담소하다. 남녀 모두 큰방에 자리했다.
11:10 북안면 부면장이 인사를 오다. 50살 내외로 보인다. 들어오면서 넙죽 엎드려 절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고 덕담을 늘어놓고, 특히 금년에는 원당 숙원 사업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다시 넙죽 엎드려 절하고 떠났다.
11:30 집사람이 겉옷을 챙겨서 살짝 빠져나간다. 조금 있으면 점심으로 집사람이 좋아하는 소고기 국밥이 나올 텐데, 왜 먹지 않고 일어설까? 그래도 2시간 동안 마을 분들과 어울렸으니 할 일은 다 했다. 집사람은 이곳에서 새댁으로 불린다.
11:45 얼마 후 나도 겉옷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돼지고기 수육을 몇점 들었더니 점심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다가 83세 되는 아무개 노인이 선물 받은 거라고 가져와서 강권하는 바람에 받아 마신 술이 몸을 데운 탓에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있기가 불편했다. 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40도짜리다. 요즘 시골 분들은 술을 많이 드시지 않는다. 담배 피우는 분들도 없다. 면에서 유류비가 나오는 바람에 난방도 빵빵하게 한다. 점심 먹을 때 됐는데 왜 가냐 하기에, 잠간 바람 쐬러 나간다 하고 나왔다. 이장과 경로회 회계가 마을 땅 평탄 작업 건으로 밖에서 의논하고 있었다. 나도 한 두 마디 거들었다. 이장이 하는 말이, 퇴비를 마을 광장에 쌓아놨으니 목사님 신청하신대로 20포 가져가세요, 한다. 발이 시원치 않으니 딸 둘을 포함해서 온식구를 다 동원해야겠다.
12:10 집사람에게 ‘오후에 병원에 갈 때 당신이 운전을 좀 해야겠소. 회관에서 마신 술 때문이오.’ 했더니, ‘아이참, 귀찮은데, 오늘 안 가면 안 돼요?’ 한다. 요즘 킬튼가 뭔가에 빠져 있어서 방에서 나오기 싫어한다. 알았어, 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 (헛)기침 콜록콜록하고, 발목 접찌르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하며...
12:30 컴퓨터 키고, 영화 ‘귀향’에 대한 기사와 몇 개 글을 읽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몇 시인지도 모른 채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잠들다. 사실 어제 밤에도 발의 통증이 다 사라지지 않았고, 게다가 약간 부었고, 열도 나서 깊은 잠은 못 잤다. 혹시 내 발이 세균에 감염된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잠깐 했다. 그런데다가 알코올 기운이 있으니 낮잠이 얼마나 달았겠나.
14:00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설날 때 선물로 들어온 냉동 떡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늦은 점심으로 먹고, 약을 먹다. 식탁 앞에서의 자유를 만끽하다. 요즘 식탁에서의 읽을거리는 이길용 박사의 책 『이야기 세계 종교』다. 재밌다. 오늘 읽은 대목은 ‘불교가 인도에서 약해진 이유’다.
15:00 집사람에게 ‘영천 나갔다 올게. 시청에 들려서 여권 찾고, 병원에도 갔다 올게.’ 하니 ‘술 깼어요?’ 한다. 자기가 운전하지 않아도 되니 기분이 좋은가보다. 여전히 자기 방에 앉아서 킬트 작업 중이다. 몇몇 분리수거 쓰레기를 정리해서 카니발 뒷자리에 실어서 중간 장소에 부리다. 영천 기차역에서 시청으로 가는 중간에 다리가 있는데, 그 아래 고수부지에서 대보름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거기 모인 사람 중에서 어떤 이는 다리 위로 지나가는 내 카니발을 보았을지 모른다.
15:40 대동정형외과 데스크- 정용섭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왔었습니다. 정용섭 님 진찰실로 들어오세요. 진찰실- 안녕하세요? 좀 어떻습니까? 예, 통증은 많이 좋아졌는데, 좀 부었네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빠질 겁니다. 약은 남아 있지요? 한번 먹을 거만 남아 있어요. 그럼 오늘은 물리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겠네요. 그럼 회복이 빠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사 맞으시고, 3일치 약을 드리겠어요. 예, 알았습니다. 주사실- 엉덩이에 맞는 겁니다. 옷좀 내리시고, 윗옷도 좀 잡아주세요. 약국- 바로 옆에 있는 평화약국에서 약을 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 평화약국이라, 이름이 좋다. 지난 토요일에 들렸을 때는 약사가 약국 바닥 비질을 하고 있었다. 천정에 형광등 숫자가 이상할 정도로 많다. 왜 이렇게 형광등이 많아요, 하고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오늘은 대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17:00 서재로 올라와서 다시 컴퓨터를 키다. 답 메일을 간단히 적어 보내다. 메일을 보낸 청년은 요즘 ‘서정과 서사의 차이’를 공부하느라 골치 아프단다. 정신적으로 쑥쑥 자라는 거 같다.
17:30 1층으로 내려가 쌀을 씻고 압력밥솥에 앉히다. 늘 세 컵이다. 30분쯤 불린 후에 스위치를 눌러야겠다. 요즘은 찹쌀 섞은 쌀밥으로 한다. 집사람은 잡곡밥을 좋아하고, 나는 소화 문제로 쌀밥을 선호하다. 옛날에는 콩밥을 좋아했다. 집에 있던 잡곡을 다 먹은 뒤에 소화 운운하면서 쌀밥을 강하게 주장하자, 밥 하는 걸 나한테 완전히 일임하면서 허락해주었다. 참 오랜 투쟁 끝에 얻은 승리다.
18:10 아내가 ‘밥 먹읍시다.’ 한다. 나는 아직 밥 생각이 없다. ‘당신 먼저 먹고 운동 가요. 나는 나중에 먹을 테니까. 밥을 아직 누르지 않았는데, 어쩌지?’ 하자, ‘햇반 먹지 뭐.’ 한다. 전기밥솥 스위치를 40분으로 맞추고 다시 서재로 올라와서 달이 언제 나타나나 계속 기웃대다. 구름이 잔뜩 끼었으니 올해는 포기해야겠다. 어제는 괜찮았는데...
18:30 어제 교회 아무개 교우에게서 빌려온 포르투갈 작가 사라마구의 『카인』을 펼쳐들다. ‘노벨문학상과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세계적인 거장 주제 사라마구 최신작’이라는 카피가 표지 오른쪽 상단에 실렸고, 네 다리가 하나로 묶인 양 사진이 표지 아래 부분 반을 차지하고 있다. 바탕을 검은색이고 제목 ‘가인’은 붉은색이다. 계속 등쪽 창문 밖을 힐끗거린다. 뿌연 달빛이라도 보고 싶어서...
19:00 드디어 20도 각도에서 달이 나나났다. 달이라기보다는 아주 희미한 달빛의 흔적이다. 그것도 들쑥날쑥 짧은 순간 보였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제 포기하고 커튼을 쳐야겠다. 원당에 어둠이 짙게 깔린다. 아래층에서 밥 먹으러 내려오라 부른다. 월요일 저녁은 상대적으로 반찬이 푸짐하다. 주일 교회에서 먹다 남은 반찬을 가져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집사람은 자기도 발목이 약간 불편해서 운동 하러 가지 않겠다고 한다. 꾀를 피우는 듯하다. 첫째 딸이 먼저 밥을 먹고 일어서면서 ‘아빠, 오늘 택배 온 거 없어요.’ 한다. 있지. 피아노 위에 올려놨다. 나는 집사람이 먹다 남은 햇반과 새로 지은 밥을 더 보태서 적당하게 먹었다. 맛있게. 집사람은 설거지 하면서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네.’ 한다. ‘마을 총회에 가서 마셨잖아.’ 하자, 그건 믹서커피고, 즉석으로 갈아 짜 내리는 우리집 커피 말이야, 한다.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부엌 겸 거실 안에서 날아다닌다. 어둠이 점덤 더 짙어지는 이 순간 원당마을 서편 언덕에 자리한 우리집의 풍경을 누군가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둘째 딸은 아직 들어오지 않고...
20:00 밥 다 먹고 나자 집사람이 한방으로 된 감기약 먹어요, 한다. 안 먹도 돼요. 그럼 쌍화차라도 마셔요. 그러지 뭐. 밥 차리다가 접시 하나 깼는데, 그 조각이 카펫 위에 떨어졌을지 모르니까 청소기 한번 돌려요, 한다. 1층에서 볼일을 다 끝내고 마당에 나가 마을과 하늘을 휙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와 다시 『카인』을 펼쳐든다. 잔기침이 띄엄띄엄 나오고, 가래도 여전하다. 약간의 감기 몸살 기운은 기분을 오히려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상승이라기보다는 안정시켜주는 듯.
21:00 매일묵상 글을 정리하다.
이후는 다음의 것들로 채워질 것으로 추정됨. 주일 설교 초안 잡기, JTBC 뉴스 중에서 관심 있는 꼭지 보기, 다비아 확인하고 답글 달기, ARD(독일제1방송) 다큐 보기, 스트레칭 하기, 12시에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기도하고, 누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으며 잠속으로 빠져들기. 만약 날이 맑았으면 마당에 나가 ‘달밤에 마당 걷기’나 ‘별보기’도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하루가 지났다. 내일도 다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테니스장에는 언제나 나갈 수 있을지, 열흘이 넘어 동호회원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겠다.
우와~ 생생한 하루입니다.^^ 제 고향 영천에서의 하루를 보내시는 그 동선이나 시청,병원,다리
저는 그저 눈에 선하네요 목사님.^^
하루를 산다는 것이 참 기적같다가도 무료하기 그지 없고 반복되는 일상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저는 오늘 저녁 달을 보며 우울했더랬습니다.
같은 시각 목사님의 시각과는 참 다름에 부럽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여전히 어느 곳에 가도, 누굴 만나고 무엇을 가졌더라도 그때 뿐 만족할 수 없는
나의 실존이 참 무능하고 바울의 표현대로 곤고한 자, 사망의 몸 같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도 생깁니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일상에로의 퇴락'은 누구나 피할 수 없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이 허무함과 무료함에서
자유롭고 싶고 생동하고 싶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기도가 필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