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십자가의 원수
바울은 지난 설교 성경본문인 빌 3:18절에서 자기와 대립하고 있는 이들인 할례파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는 우선 세상에서의 실패를 가리킨다. 예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실패를 저주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승리주의이다. 바울의 인생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했다. 고생이 심했다. 당시 주류 기독교로부터 인정도 받지 못했다. 이런 걸 근거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기 구원을 무력화한다.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믿는다는 것은 그 이외의 것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공부, 취업, 결혼, 돈벌이 등등, 모든 것들이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이 다 그런 것이다. 그것 없이 인생을 살아가기는 불가능하다. 바울과 대립하던 사람들이 강조한 토라와 할례도 이런 노력의 하나다. 그러나 십자가 신앙이 말하듯이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그런 노력에 자기의 운명을 걸지 않는다는 뜻이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삶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는 표현에 ‘원수’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과격해보이지만 이건 진리 논쟁에 속한 문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상대화하는 모든 것을 원수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하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기에
거기로부터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세속 직업 없이 교회에서만 살아온 사람으로서
제가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설교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없지 않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가 그런 대상이겠지요.
교회 성장이 목사의 자기 성취가 되는 거잖아요.
거기에 매몰되는 목사도 있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 쓰는 목사도 있어요.
자기 의지만으로는 큰 효과가 없을 거고,
다른 어떤 것에 사로잡혀야겠지요.
그래도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은혜로만 가능하겠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 인생자체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삶일텐데요..
그렇다고 이 수고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테고..
수고를 하며 살되, 오직 이삶만이 내 최고의 목표로, 진리로 목매달지 말라는 뜻 같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듯..
삶의 수고하는 노력에 자기 운명을 걸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와 함께 죽는 신앙이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리로 생각하는 묵상을 하더라도..
십자가를 진리로, 자기 운명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속에서 살다보면..
원수로가 아니라, 친구로 생각이 드니.. 어찌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