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재앙과 죽음의 타자화
지난 설교의 제목은 ‘유예된 심판’이었다. 상투적인 제목이긴 하다. 심판이 유예되었으니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을 잘하자는 뜻으로 보였을 테니 말이다. 실제로 저 설교의 결론은 그랬다. 예수 믿음에 몰입해야 한다고, 그럴 때만 유예된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매주 선포되는 설교의 결론은 사실 한 가지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게 모든 설교의 결론이다. 결론은 같아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다르다. 그 과정에 따라서 설교의 수준이 평가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성서해석이다. 해석학적인 설교가 있고, 그게 없는 설교가 있다.
지난 설교가 해석학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의 하나가 ‘재앙과 죽음의 타자화’라는 표현이다. 폭동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의 칼에 진압당한 사건을 예수님에게 전한 사람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는 재앙의 타자화를 볼 수 있다. 재앙을 자기의 삶에서 분리해 내는 것이다. 그런 삶을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여긴다. 그런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표면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재앙을 당한 사람 못지않게 불안하게 산다고 보는 게 옳다.
모든 불행과 재앙의 종결인 죽음을 보자.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다.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자기와 상관없는 듯이 산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무의시적으로는 알지만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늙으신 부모들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한 적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라. 죽음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예전에는 퇴락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삶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요즘은 이래도 저래도 한세상입니다. ㅋㅋㅋ
재앙과 죽음을 타자화하는 자기기만도 결국 지칠때까지 해야 끝이 납니다.
최근에는, 세상 이곳 저곳에, 또 이런저런 글들속에 가식과 위선들을 보면서 속이 참 메스꺼웠는데,
그런 위선과 가식 속 자기기만도, 그걸 보는 똑같은 나도 결국 모두 힘을 다해야 끝이 나는 듯 보이네요.
가장 좋은 건, 글을 읽고 싶거나 쓰고 싶지 않으면서, 뭔가 욕구하지 않으면서도 충만한 상태가 있는데 그게 좋은거 같아요. 이것이 예수와 신학과 어케 연결될지는 신학공부를 좀 더 해봐야겠고요 ...
아 ~~~ 일면불 월면불인가요 ㅋㅋㅋ
저도 좌선하는 기독교인으로써 종종 그런 충만함을 경험할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온갖 성난 파도가 가라앉고 난후에 찾아오는 고요와 고독 적막한 충만함입니다.
황당하실테지만 목사님도 좌선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ㅎㅎ
저는 성품이 곱지 못해 이번생에 깨닫기는 다 글렀고 목사님이 취미삼아 해보신다면 예수와 부처를 종합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실수도 .. ㅎㅎ
정말 좌선은 인간이 발견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죽을 때까지 구도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재앙과 재난속에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고 구도정진하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업적과 일시적인 즐거움에만 자기삶을 확인하며 살고 싶진 않습니다.1차원적인 욕구만을 충족하며 산다면 삶이 허무해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자아실현이라는 고차원적 욕구도 참된 평안을 줄 수가 없지요. 죽음이라는 모든 이에게 예외가 없는 재앙을 극복할 수 있고 참된 만족과 평안이 되시는 예수를 계속 알아가고 싶고 그 분에게 제 운명을 걸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