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0일
ultimate concern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단어는 오래 전에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신학자 폴 틸리히가 신학용어로 언급한 것이다. 이게 완전히 새로운 말은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다. 구원, 하나님 나라, 하나님, 사랑이 다 궁극적인 실재다.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궁극적 관심이다. 이런 관심이 종교의 원천이다.
궁극적이라는 말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일상에 쫓기면 그것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기 어렵다. 설사 만난 사람이 온통 그 사실에만 매달려서 주변을 살필 수 없는 거와 같다. OECD 국가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은 ‘쫓김’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삶의 궁극, 그 근원에 대해서 마음을 둘 여유가 없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종교의 깊이에 천착한다기보다는 삶에 쫓기는 불안을 벗어나려고 값싼 위로를 받는 데 머무는 경우가 많다.
궁극적이라는 말은 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다 무상하다. 집, 직장, 친구, 가족 등등,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다 지나가고 끝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곧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궁극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궁극적인 관심은 그런 것들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그것 너머, 그것의 심연, 그것을 초월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다. 고대인들도 그런 마음으로 하늘의 별을 보고, 인간의 미래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예배했다. ultimate conc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