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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2일
탕자와 예수
지난 설교 중에 나는 위험한 말을 했다. ‘예수는 탕자입니다.’ 탕자도 버림받은 운명이고, 예수도 버림받은 운명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운명이었다. 당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탕자의 버림받음은 자신의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만 예수의 버림받음은 자신의 잘못이 전혀 아니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결과다.
욥의 재앙도 욥의 책임은 아니었다. 욥이 하나님께 거칠게 항의하는 건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하나님을 부정하기 마련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을 부정하는 이들이 논거로 삶은 것은 인간의 고통이다. 아우슈비츠 이후로 신학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그것과 연관된다. 오늘의 이 부조리한 현실을 볼 때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무신론자들은 신을 가리켜 인간의 자기 투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대상, 환상 등등으로 비판했다. 그런 신을 믿느니 휴머니스트로 사는 게 옳다고 한다. 이런 논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신학도 끊임없이 대답을 시도했고, 지금도 대답을 찾고 있다.
‘내 죽음에는 당신 책임도 커!’ 하고 말해도 될 만한 상황에서 예수는 끝내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그에게 맡겼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욥은 어떻게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말할 수 있었나? 탕자는 그 불안한 상황에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