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1일
21세기 영지주의
설교에서 나는 21세기 영지주의가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했다 해서 자본주의와 자연과학 자체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는 건 아니다. 선과 악은 칼로 무를 자르듯이 구분되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을 봐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 교차된다.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선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건 아니다. 인간과 삶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다 따라잡을 수 없는 심연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한 것은 악하다고, 선한 것은 선하다고 말해야 한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몸을 부정하고 영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몸을 부정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몸의 죽음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에 부정될 수 없지만 확인할 수 없는 영의 불멸에 기대서 죽음을 부정, 또는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왔다. 죽어 썩는 인간의 육체를 보면 그걸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가 고대인들에게는 영지주의로 나타났다면 현대인들에게는 자본주의와 현대과학으로 나타난다.
자본을 구원의 출처로 여기는 자본주의와 기술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연과학에 기대서 현대인들은 죽음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전문화된 장례식 문화도 이에 한몫 거든다.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어도 호텔이나 카페처럼 꾸며놓은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죽음이 자기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긴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배움도 없고 준비도 없이 죽음을 맞는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어쩌다가 아기 낳고 사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가 강요하는 것에 매달려 살다가 죽음 앞에서 당황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