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8일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기(1)
‘예수는 생명이다.’는 명제는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다.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말하려는 중심도 바로 이것이다. 이 명제는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명제와 똑같다. 구원은 바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우리 삶을 견인해내는 해석학적 토대다. 왜 그런가?
‘예수’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질문해야 한다. 2천 년 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목수로 살다가 서른 살에 출가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중에 로마 형법에 따라 십자가형으로 죽은 그 역사 인물을 가리키나? 그의 가르침과 행위, 그리고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나? 그를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실질적으로 믿기는 쉽지 않다. 차라리 원수 사랑과 같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기독교는 그 토대가 취약한 편이다. 아니 위험하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뇌가 작동되는 경우에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을 생명으로 여길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리고,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생명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반드시 죽는다. 한 순간에 살아 있던 것으로 생명이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생명이 예수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의 근거는 무엇인가?
완전한 생명이 예수를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일단 완전한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절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남들에게 변증하기도 쉽지가 않고 저 또한 확신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져 시대 정신이 요구하는 것들이 절대적인 생명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소유지향적이고 물질만이 절대적인 생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저도 돈과 소유가 절대적인 생명이고 내 여생을 보장해줄 수호신처럼 보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는 아픔이 얼마나 크고 비참한지 직접 체감을 해보니 알겠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참된 생명이라는 것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