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6
영혼의 만족
나는 최근 설교에서 영혼의 만족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최근만이 아니라 늘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었고, 이전에도 여러 번 말했겠지만 최근에 좀더 강하게 표현했다. 영혼의 만족은 사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 문학, 음악활동도 이것을 목표로 한다.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가리켜 영혼의 만족이라고 설교에서 말했다. 이런 표현을 가슴의 울림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삶이란 게 세상에서의 필요성을 채우는 것으로만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채우는 노하우다. 그걸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노하우를 잘 알아야만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만이 현생 인류가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되는 내적 동력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만족을 모르고 무한정으로 확장된다는 데에 있다.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차원의 삶에 이르려면 세상의 것보다 월등히 좋은 것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다. 결국 영혼의 만족을 실질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려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이 ‘하나님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가 보화로 여겨지려면
루디아처럼 그 분이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만 가능한거겠죠?
물론 루디아가 보화를 발견하기까지 구도자적 신앙여정을 밟아온 것이
그분의 은혜를 덧입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될수도 있겠죠?
바울 또한 그가 대면하게 된 진리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수 없다는걸 각성하였기에
그동안 좇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노라.. 그리도 담대히 고백하였겠죠?
이 세상 것 그 무엇도 우리 영혼에 진정한 만족과 안식을 줄수 없음을 이젠 증언하며 살아갈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분만으로 충만해지길 희구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실존속에서 예고없이, 간단없이 찾아오는 우환에 직면할때면
"절대생명 절대만족 절대기쁨이 그런 것들에 휘둘릴수 있으랴.... " 하는 결기는
여지없이 바람앞에 촛불 신세가 되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온 영혼이 눈 앞의 문제에 사로잡혀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때가 다반사이니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할뿐입니다..'
이런 고백은
그저 성경속에서나 나오는 위대한 종들이 그려낸 신화일뿐일까요?
아니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우리로서는
소천하기 전날까지 감히 범접할수 없는,
평생을 무지개를 잡으려다 반백의 할아버지가 되고만 어느 소년 이야기
그 후속작을 써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부스러기 님처럼 생각하는 분들에게도
설득력이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복음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 어쩌면 좋을지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부스러기 님처럼 고민하거나
아예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내가 당장 암 진단을 받거나
자식들이 큰 사고를 당한다면
아마 영혼의 만족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아서
뭐라 딱 끊어 말하기는 어렵군요.
다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내가 실질적으로 알고 믿기에
잠시 힘들어하겠지만 곧 정신 차리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잡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수행이겠지요.
이 세상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바로 영혼의 만족인데 기독교 만의 차별성은 세상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건가요?
여러 사이비 종교 신도들 그리고 불교에서 해탈하신 스님들은 영혼의 만족을 느끼며 살아갈텐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영혼의 만족과는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가요? 이 세상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보여지는데 종말이 와야만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