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1일
예수와 절대 생명
재림신앙의 토대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절대생명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런데 절대생명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그게 세상에 던져진 우리의 실존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고, 따라서 그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거와 같다.
다만 이렇게는 생각할 수 있다. 상대적인 생명을 초월하는 생명이 곧 절대생명이라고 말이다. 상대적인 생명을 직관하는 게 절대생명에 이르는 최소한의 발걸음이다. 지구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은 살아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으며,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100년 후에 이 땅에 살아남을 인간은 극소수다. 그 100년은 한 순간이다. 200년도 한 순간이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 하나 죽은 거와 다를 게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먹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정한 기간 동안 먹지 못하면 죽는다.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해도 외로움과 허무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생명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런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예수를 통해서 절대생명을 경험한 것이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말은 다 안다. 문제는 예수를 통한 절대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부활 경험이다. 이게 일단 정확한 대답이다. 그러나 부활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여기서 순환론에 빠질 수 있다. 절대생명은 예수의 부활이고, 예수 부활은 절대생명이라고 말이다.
예수가 절대생명이라는 경험은 예수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와 더불어서 죽어도 좋다는, 예수와 함께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는 경험을 했다. 왜냐하면 그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때 예수와 함께 죽고 산다는 말이 그것을 가리킨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대상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느끼는 거와 비슷하다. 그 사랑 경험이 얼마나 무게가 있는 거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