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7일
방언
설교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하나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어를 말하거나 외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런 현상을 믿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외국어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도 믿지 못한다. 이런 현상이 교회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을 경계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방언 현상이 이해가 간다. 방언 현상의 핵심은 언어의 뒤틀림이다. 일상적인 언어가 해체되는 사건이다. 일상적인 언어는 문법적인 논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가 분명해야 한다. 책상, 연필, 먹는다, 마신다 등등의 소리를 정확하게 내야만 한다. 그런 것들이 해체되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논리적인 언어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건 아니다. 깊은 한숨이나 기쁨의 환호성은 그냥 소리일 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전달이 된다. 이런 점에서 방언을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 언어라고 보면 안 될까?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말이다.
내가 보기에 방언은 절규다. 절규는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 전제된다. 가장 깊고 어두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일반적인 언어에 머물 수 없다. 강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에 머물 수 없는 거와 같다. 나는 지금 방언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현상을 말하는 것뿐이다. 어쨌든지 깊고 어두운 세계에 대한 경험은 공유가 불가능한 것이니,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하지 않는 게 좋다.
나는 방언을 하지 않는(못한)다. 방언을 할 만큼 삶의 깊고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계를 얼핏 보았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성이 절규 발산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설교 행위는 본질적으로 방언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즐겨합니다. '방언'은 이성으로 이해되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라 할 수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해되고 알아 먹어지는 이성의 만남도 있지만, 더 깊은 만남은 초자연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기도를 할 때 내 마음에 주님의 영이 가득 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방언이 어두운 세계의 언어일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관상기도를 하고 있는데, 이성(생각)과 무아(생각의 뒷편, 잠재의식)의 아래 부분에 도달할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이 세상 문법적인 기도나 언어가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무의미해진다고나 할까. 그 순간에는 하나님과 교감하는 다른 형태의 문법이 나옵니다. 이게 '방언'이지요.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도원이나 이런데서 북치고 장구치며 카타르시스를 느낄때 나오는 어지러운 방언(관상기도에서는 어지러운 방언 혹은 낮은 단계의 방언 이라고 표현합니다.)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언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댓글이기에 자제합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어쩌면..
우리는 비밀한 방식(성령)으로 방언을 알아듣고,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전에는 목사님 설교가 넘 어렵고, 도대체 뭔말인지 이해가 안됐는데..
이젠 이해가 되고, 생명의 세계안으로 끌려 들어가는듯한 설교가.. 감사가 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명으로 붙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기쁨과 감사와 행복입니다.
방언을 받았지만, 알아들을수도 없는 말을 지껄이는 방언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해되고, 알아먹어지는 이 방언이 더 좋은거 같습니다.ㅎ
정목사님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