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
성령 경험과 사물 경험
오늘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의 하나가 순수 심령주의적 성령 이해다. 일종의 영육이원론적인 시각이다. 신령한 사람은 세상과는 담을 쌓고 오직 기도와 말씀과 찬송만 전념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의 태도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도와 말씀과 찬송은 우리의 영혼이 성령과 공명할 때 일어나는 마땅한 삶의 태도다. 수도원 영성이 이런 것에 토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극단에 치우쳐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 자체를 뭔가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건 오해다. 수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몸으로 하는 노동도 중요한 수행으로 여긴다.
설교 중에서 짚었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사물에 대한 느낌이 더 새롭게 다가온다. 사물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황홀한 느낌도 받는다. 어떤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사물을 잡기도 한다. 지금 내 책상 위에서 여러 사물이 놓여 있다. 연필꽂이, 작은 스피커, 책받침 대, 수첩, 메모장, 손 완력기 등등이다. 그것들이 ‘없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내 책상 위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놀라운 일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길은 사물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온전히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사물과 더불어서 논다. 어른들도 이런 방식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사물과의 놀이에는 돈도 들지 않는다. 공기를 마시는데 전혀 돈이 들지 않는 것처럼 삶의 환희를 누리는 데는 돈이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허락하실 것이다.’는 예수의 말이 이해가 간다. 성령 경험은 사물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근거를 대려면 얼마든지 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