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나무심기
어제 비가 와서 그동안 벼르던 작업을 해치웠다. 창문 밑에 나무를 심는 작업이다. 창문이 동향이라서 여름철 아침에는 햇볕이 너무 깊이 들어온다. 집사람과 큰딸이 사용하는 방이다. 내가 사용하는 2층은 훨씬 상황이 나쁘지만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여의치 않아서 이제는 포기했다. 다행히 나는 더위와 추위 참을성이 제법 많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저녁 5시가 넘어서 집을 나섰다. 눈 여겨 두었던 영천 묘목 농원에 주인이 없었다. 묘목들도 시원치 않아 보였다. 시즌이 지나서 판을 거둔 거 같았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하양으로 차를 돌렸다. 그곳 농원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수년 전에도 그곳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비가 온 탓인지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전화를 걸자 5분만 기다리라고 한다. 창문 밑에 심을 나무 두 그루와 아주 작은 유실수 묘목 한 그루를 샀다.
농원 사장에게 부탁해서 흙도 두 포대 얻어왔다. 사각형 박스는 플라스틱으로 된 제초제 분무기다. 한말 들어간다. 앞으로 제초제를 몇 군데 뿌려야겠다. 작은 사다리도 하나 샀다. 기존 사다리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움직이기 힘들기도 하고, 집안의 전구를 갈 때는 이런 작고 가벼운 사다리가 필요하다. 영천 농원으로 가던 길에 농기구 판매점에 먼저 들렸다.
현관에서 가까운 쪽의 나무는 아래와 같다. 자태가 옆의 나무보다 좀더 담백하다.
밖에서 집으로 올라오면서 만나는 쪽의 나무는 아래와 같다.
수목이 다르다. 나무 이름을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내년에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 근데 내년에 꽃이 핀다는 보장은 없다. 내가 보기에 이 나무의 생존할 확률은 50% 정도다. 요즘은 나무심기 계절로 좋지 않다. 3월부터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게을러서 때를 놓쳤다. 농원 사장이 물을 ‘사흘들이’로 주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사흘만에 한 번씩 주면 되나요?’ 했더니, 그게 아니라 마르지 않게 거의 매일 자주 주란다. 이 나무가 살까요, 했더니 ‘살긴 삽니다.’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년에 사과와 복숭아 묘목을 심었는데, 복숭아는 살고 사과는 죽었다.
나무 이름의 힌트를 말하면, 현관에 가까운 나무는 흰색이고(소설가 한강의 최신작이 ‘흰’이라고 하는데...), 옆의 것은 노란색이다. 개화 시기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비슷하게 피면 어울릴 거 같다. 창문을 통해서 바짝 붙어 있는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는 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의 하나다. 맨부커 상을 받는 것보다 훨씬 큰 기쁨이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어디 이런 꽃과 나무만이겠는가. 사물을 느끼는 건 모두 에로티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이 결국 공으로 돌아갈 것이며, 아니 지금 그것이 동시에 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가 현재 색으로 느끼는 이것보다 더 황홀한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느낌으로 돌보다 더 딱딱한 땅을 낑낑대며 파고, 그 안에 물을 가득 넣은 다음 나무를 심고 얻어온 흙을 부어주었다. 농원 사장이 알려준 방식대로 했다. 키가 더 크고 잎사귀가 더 많은 나무에는 받침대를 튼튼하게 해주었다. 태풍이나 불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두 친구가 살아서 내가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 나를 맞아주었으면 한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리도 그 다음 해에도, 내가 죽음 다음에도 오랫동안 살아있기를 바란다. 내가 잘 돌보고 운이 좋으면 내년에는 꽃을 피울 것이며, 그렇게 정이 들면 나의 소울메이트가 될지도 모른다. 이번의 나무심기가 나와 가족만을 위한 작업은 아니다. 나는 잠시 살다가 떠날 것이며, 다음 세대에 누군가 이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 세대가 저 나무를 친구로 삼을 것이다. 그가 나무를 심은 나를 기억하던 않던 상관없다. 나는 지금 이 한 순간(아우겐블릭)에 필요한 작업을 한 것뿐이다. 별 거 아닐 수도 있고, 별 거일 수도 있다. 긴 시간에 한 점으로만 허무하게, 동시에 긴 시간에 연결된 한 점으로 의미충만하게!
목사님, 오랜만에 댓글 올립니다.
요즘 제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는 생각거리가
'순간을 사랑하라' 인데요.
사실 제가 뭘 모르고 데꼬 있는 것 같기는 한데요,
목사님 글 읽다 용기를 내 봤어요
저한테는,'순간은 영원이고 영원 또한 순간이다.'
암만해도 이렇게 생각 되어요.
그리고. 요렇게도요.
순간이 공이고 색이고, 영원도 또 그렇고.
제가 좀 달떠 좋아하네요.^^
아, 그럼 이 순간을 사랑하려면..
내 몫의 나무를 잘 심는거구나..
햇볕과 물과 바람의 도움을 받아서..
목사님, 내가 영원의 한 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보다 더 자유할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더 평안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 안에 있기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예, 목사님 답변 감사합니다.
이렇게 피드백을 받으니 옛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나무 심는 것도 '내 행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행위와 존재가 일체인데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심기는, 햇볕과 바람과 물의 도움없이는
암것도 안 되기에, 행위주체는 내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러고보니,또 하나의 자유를 얻는군요.
그렇잖아도 저도 "내일 지구 종말이..." 가 어떤 문맥에서 쓰여졌을까,
난생처음 궁금해졌어요.
목사님의 나무심기가 허무하고도 충만하고,
즐거우면서도 슬프네요...
모쪼록 심으신 나무들이 다 잘 살아주었으면..,
그래서 이담에 그 집에 살 사람들에게까지
두고 두고 풍성한 그늘을 드리워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