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죽은 자의 소생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예수가 살렸다는 이야기가 눅 7:11-17절에 나온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여기 외에도 복음서에 몇 군데 나온다. 마 9:18-26절에서 예수님은 한 관리의 죽은 딸을 살린다. 이 관리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회당장 ‘야이로’라고 부른다. 성경이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고 야이로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전한다. 예수는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한 후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요 11장에는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가 나온다.
복음서에 죽은 자를 살린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위에서 짚은 대로 세 가지다.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공관복음서가 다 전하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이야기는 누가복음만, 그리고 나사로 이야기는 요한복음만 전한다. 여기서 시각적인 묘사를 가장 많이 제공하는 것은 나사로 이야기다.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예수가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수의를 입은 채로 마치 강시처럼 무덤 동굴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나는 설교에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이 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그렇다. 나무와 꽃도 그렇다.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돌아올 수는 있지만 죽음의 선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불가역이다. 다시 돌아왔다면 그건 죽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공기보다 가벼운 물질은 공중에 뜨고,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이게 창조 원리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으니 하나님이 원한다면 죽은 생명도 다시 살릴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 마지막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종말이 오기 전에 일시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 원리를 부정하는 행위를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불신앙이나 광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