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1일
하나님 나라의 ‘오늘’
만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존재의 방식(힘과 존재)이 결합되어 있다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참 존재에 있어서 세계의 미래라는 뜻을 함유한다. 모든 미래의 경험은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하나님 자신과 관계되어 있다. 이 경우 한정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미래가 그 안에서 현재가 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우연적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유한한 현실을 자기 자신의 강력한 미래와 구별함으로써 존재하게 하신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실존적 각성은 우리의 삶이 모든 유한한 사건들을 초월하는 풍성한 미래와 관계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이 미래의 힘은 모든 피조물에 한결같이 직면하는 단일한 힘으로서 그 자신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힘을 세계를 통일하는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판넨베르크, 이병섭 역, 신학과 하나님 나라, 83쪽).
나는 13일(월요일) 김영진 목사가 시무하는 들꽃마당 시온교회를 방문하는 자리에서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고, 몇 명이 모이든 상관없이) 특강을 하기로 자청했다. 제목은 <하나님 나라의 ‘오늘’>이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오늘’에 방점이 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오늘과 하나님 나라가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런 설명에 도움이 될까 해서 판넨베르크의 책을 읽는 중이다. 거기서 위의 인용문을 따왔다. 저 인용문만 잘 설명해도 당일의 특강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미래의 힘’으로 규정한다. 사람에게는 미래가 불확실하다. 그래서 실존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 불확실해 보이는 그 미래를 하나님만이 고유한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미래의 힘, 즉 종말의 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완전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열린 질문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 내가 이해한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오늘의 제한적인 삶을 초월하는 종말을 선취(先取)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미래의 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안다면 선취의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13일에 있을 특강을 11일인 지금 이미 내가 선취하고 있듯이 말이다.
예수는 마 6:25-34절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그러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마침 대구샘터교회에서 지난 수요일에 공부한 내용이다. 이방인들은 생존에 대한 염려를 삶의 내용으로 삼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데, 삶의 내용으로 삼는다. 하나님 나라를 삶의 내용으로 삼는다는 것은 미래의 힘인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여기까지는 조직신학적인, 또는 성서학적인 설명이다. 이를 근거로 실제 기독교인들이 그 하나님 나라를 ‘오늘’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생존에 대한 염려가 가득한 세상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서 미래에 결정될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삶이 실제로 가능한가? 앞에서 말한 종말의 선취라는 게 신학적 해명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가능한가? 나는 그걸 어떻게 경험하고 있나? 13일이 될 때까지 며칠 동안 이런 문제를 좀더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