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율법주의
어제 설교 ‘율법과 십자가’에서 율법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은 했다. 그런 설명을 설교 시간에 들어도 그게 마음 깊이 각인되기는 힘들다. 더구나 삶의 내용으로 자리를 잡기는 더 힘들다. 가능한 반복해서 그것에 대해서 듣고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신앙 연습인 셈이다.
신자들은 바리새인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이 바리새인과 똑같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부정했지만 자신들은 지금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신앙생활 행태는 바리새인과 다를 게 없다. 양쪽 모두 율법주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율법주의는 인간의 업적에 초점이 놓인다. 신학 용어로는 ‘업적의(義)’라고 한다. 이것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생각해보라.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하는 삶이 어떤지를 말이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부담을 느끼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법으로 강제되니까 그대로 따른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작용한다. 힘들지만 업적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율법적으로 살면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때로는 권사나 장로 등의 직분으로 보상을 받는다. 더 나가서 하늘나라에 황금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일종의 보상심리가 여기에 작동한다. 유치한 심리작용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에 쉽게 움직이는 법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세상살이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율법의 짐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말씀을 주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주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건 한국교회 신자들의 정신세계가 계몽 이전에 속한다는 증거가 아닐는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기억해두세요.
동굴 안에서만 평생 산 사람은
동굴 밖의 세계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어쩌다가 동굴 밖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두려워서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둠침침하고, 습하고, 곰팡이 냄내 사고, 박쥐가 들끓고,
지하세계와 비슷한 그런 것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자유와 해방은 물론 죽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더불어 죽음을
선취, 즉 미리 당겨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긴 하나 죽은 것처럼 사는 거지요.
그게 잘 안 되는 거 압니다.
저도 잘 안 됩니다.
신앙의 내공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요.
결국 중요한 건 우리가 예수의 운명을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 통치로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웃기는 표현으로,
지금 우리는 서른세살에 죽은 예수 보다는 더 오래 살았으니
지금 죽어도 크게 손해될 거 없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인다면
자유와 해방의 영역이 놀라운 정도로 확대될 겁니다.
문제는 세상의 방식으로 더 오래, 더 많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는 데에 있겠지요.
이런 데서 한 꺼번에 풀려날 수 없으니,
그리고 죽는 순간에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테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고 천천히 가보세요.
동굴 밖의 세계가 처음에는 눈이 부셔서 찡그려지겠지만
천천히 적응하게 되면 놀라운 어떤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또 '도사'처럼 말씀드려서 죄송하군요.
아직도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권위주의, 장로로, 권사로, 목사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지독한 그 의식으로 인해서 질식이 되고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뭔가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성경을 말하고
자신이 옳다는 식의 신앙형태, 태도들, 그리고 기도들
주일 아침 이러한 성도들의 의식앞에서 심장이 터질고 같고
분노가 생깁니다.
진리 앞에서 진지한 자세와 절대타자 앞에서 무라는 의식이 있다면
적어도 이러한 모습들을 보이진 않을텐데..
이 상황에서도 초연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영성이 제게는 없다는 것이
속상합니다.
자유롭고 싶습니다.
해방되고 싶습니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서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죽을 때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입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이런 질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아요.
질문의 대답을 계량의 방식으로 얻을 수는 없어요.
화도 안 내거나 돈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는 것,
또는 매일 기도만 하고 사는 것이 대답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대답은 질문을 하는 수준만큼 저절로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 그의 통치, 종말론저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어느 정도의 깊이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지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실질적으로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 사람들의 통치로부터 상당할 정도로 해방됩니다.
왜 자꾸 거꾸로 가는 걸까요. 신자들도 이중적이고 목사들도 이중적입니다. 말로는 바리새인의 행태를 크게 비판하지만 자신들이 보이는 모습은 그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고 그걸 강요하고 있으니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법과 제도도 필요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아직도 보이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고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