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8일
의인(義認)
지난 설교 ‘율법과 십자가’에는 의(義) 문제가 그 바탕에 놓여 있다. 율법에 의한 의가 옳은가, 아니면 십자가에 의한 의가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통한 의가 옳다. 율법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예배 출석, 헌금, 각종 봉사에서 모범적인 사람이 인정받는 거와 같다. 목사의 입장에서도 그런 신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그런 모범적인 생활태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모범적인 신자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어느 순간에는 변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율법에 집중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율법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게 자주 나타난다.
바울은 의의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의의 주체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본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을 신학 용어로 의인(義認), 또는 칭의(稱義)라고 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에 ‘탕자의 비유’가 있다. 형은 율법적으로 모범생이지만 동생은 낙제생이었었다. 아버지는 동생마저 아들로 인정한다. 바울은 모범적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칭의는 실제적인 게 아니라 법적인 의미다. 믿음으로 우리가 실제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인정을 받을 뿐이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다. 실제로 의롭지 않은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한 마디로만 말하겠다. 칭의를 경험한 사람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의로워진다. 의로워질 수 있으며, 의로워져야만 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존재가 새로워지면 행위도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게 순전히 관념에 불과한 게 아닐까? 과연 그런지 아닌지 자신의 삶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는 칭의 문제를, 즉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신앙의 화두로 붙들어야 한다. 오늘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 중의 초보를 말했다.
죄와 죽음의 삶이 우리가 사는 현실인데..
그것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한것이다..는 뜻이고,
그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이 '이땅에서 우리가 살아야할 하나님 나라' 라고 말씀 하시는 것 아닌가? 라고 이해 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이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고,
죄와 죽음의 삶이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 자체인데 그럼 이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죽으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고요.. 이세상에서 추구하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이젠 절대적으로 붙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라는 거죠. 그 속에서 살지만 그것들을 우리를 구원할 생명으로 붙들고 사는게 아니라,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우리를 구원할 생명으로 붙들며 산다는 거죠. 이것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 되었다는 뜻이고,
여전히 죄와 죽음의 삶을 사는 현실 속에 있지만, 그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것이 아닌가? 하는거죠. 제가 이해한것을 설명하려니 어렵네요.^^
기독교 신앙의 초보중의 초보를 가지고 한국교회 에서는 왜이리 말도 많고, 지적질도 많고, 시끄러울까요?
아마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신앙의 화두로 붙들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몇년전만 해도..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로 신앙을 가졌기에.. 우습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의미인지도.. 사실 제대로 모르고 삼십년 넘게 신앙생활 한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기초중의 기초, 기본중의 기본,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 " 이걸 놓치지 말아야 겠어요. 감사드립니다.^^
이걸 붙들면.. 귀신도 이길수 있을 텐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