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1일
골로새 교회(1)
지난 설교의 성경본문인 골 1:1-14절에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은 골로새 교회다. 2천 년 전 골로새에 살던 일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해서 세계관이 갑자기 완전히 바뀌는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내 따라서, 친구 따라서, 또는 직장 상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해도 그 사람의 세계관은 거의 그대로 남는다. 지금 교회 장로들도 대개는 비슷할 것이다. 그런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충돌이 심해지면 교회를 그만 둔다. 목사는 그런 충돌을 줄이기 위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가능한대로 복음의 본질보다는 종교생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설교에서도 짚었지만 고대 이스라엘 역사도 비슷하다. 유대교가 올곧게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집중한 게 아니다. 끊임없이 주변 종교와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던 이들이 선지자들이었다. 부르거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이런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종교권력에 기초한 제사장들과 충돌했다. 선지자들은 진보역사관을 따르고, 제사장은 보수적역사관을 따른다. 실제 생활 방식에서도 그게 나타난다. 선지자들은 재야 종교지도자들이었다고 한다면 제사장들은 제도권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신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했고, 제사장들은 제사행위를 통해서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말이 옆으로 흘렀는데,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공중에 떠서 오로지 순수 복음에 매달리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골로새 지역 사람들과 똑같은 삶의 조건에서 살면서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오늘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이 막장에 가까운 자본주의에 전적인 영향을 받듯이 골로새 교인들도 그랬다. 그것을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일갈했다. 바울이 대한민국교회에 다시 온다면 똑같은 말을 하지 않겠는가. 당시 골로새 교인들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듯이(그럴 개연성이 내가 보기에는 훨씬 높다. 복음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다.)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역사가 흘러야 이런 문제들이 분간될 것이다.
맞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헛된 속임수인 종교생활이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셔도
따르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