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0일
예수의 발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누가복음이 전한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 사람들은 보통 남자 제자들이다. 이번은 예외 경우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리아가, 또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 또는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까지는 다 말한다. 마리아가 발치에 앉아서 오랜 시간 말씀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만 전한다.
‘당신, 예수 발치에 앉아 있을래?’ 하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사양할 것이다. 예수 발치는 별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곳이 어딘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돈과 여흥거리를 만나는 곳이다. 큰 그림으로만 본다면 돈과 여흥과는 상관없는 교회가 예수의 발치이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예수의 발치는 생명의 깊이와 신비를 만나는 자리다. 예수를 생명이라고 인식하고 믿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그곳으로 간다. 이것도 기독교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예수가 왜 생명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에만 열심을 내지 예수 자체에 대해서는 열심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열중하면 다시 염려와 근심에 빠진다. 악순환이다. 생명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어떤 이가 정말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지, 예수가 생명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경우까지 내가 다 판단할 수는 없으니, 내 경험에 근거해서만 한 마디 하겠다. 예수에게서 발생한 구원 사건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 이외의 것에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다. 다른 일들은 대체로 귀찮아진다. 돈도 귀찮다. 지금 내가 마치 사형집행일을 하루 이틀 앞둔 사형수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테니스를 즐긴다. 땀 흘린 뒤에 마시는 맥주 맛을 즐긴다. 그 외에 몇몇 흥미를 느끼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모든 흥미도 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나의 구원이심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라 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쓰러져가는 자에게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는 소망을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가득채워 주시네
예수는 우리를 인도하는 참 길 우리의 눈을 뜨게하는 진리
고통 중에 위로가 되시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