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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박사의 설교 비평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할 길
(민영진 박사)
공헌
1. 정성이 놀랍다. 단순히 설교 한 편을 놓고서 설교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집이 몇 권이든 그것을 가능한 한 다 읽는다. 설교자의 설교가 담겨져 있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비디오테이프나 녹음테이프가 있으면 그것을 다 보거나 듣는다. 설교 텍스트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으면 그것을 다 참고한다. 심지어 비평하려고 하는 설교자의 연출 언행 몸짓에서부터 그의 이력, 신학적 배경, 목회활동, 그가 섬기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관찰까지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간행물을 통하여 이런 설교비평을 할 경우 그는 거의 매달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정력을 오로지 한 설교자 관찰에만 다 쏟았을 것 같다. 이런 비평은 평자(評者 설교비평을 수행하는 이, 이 책의 저자)로서는 자기의 삶을 다 바치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작업일 터인데 속된 말로 그의 수고와 희생을 고려하여 연구비를 계산한다면 정상급 프로 선수의 연봉은 지불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만한 대우가 없었을 터이니, 아니 대우는 고사하고, 평자가 비평하는 설교자들로부터 또는 그 설교자들의 청중들로부터 평자 스스로가 미리 받아버리는 심리적 부담 또한 지독한 억압으로 체험되었을 것이니 그의 이런 노작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수년 동안 줄곧 성실하게 해 왔고 또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성이 놀랍다고 하는 것이다.
2. 비평과 치유가 함께 있다. 설교비평에서 다루어진 설교자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객관적이면서, 정중하고 진지한 때로는 비장한 설교비평을, 때로는 화가 날 만큼 솔직한 비평을, 그것도 일반 상식 수준에서가 아니라 그 설교자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한 전문 관찰자의 평을 듣게 된다. 아마도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한 편으로는 어떤 지적에 대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불쾌한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설교에 대하여, 비록 만족할 만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처럼 성실하게 비평하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설교비평에 오른 이들은 쓴 소리와 단 소리를 둘 다 듣게 된다. 설교자가 지닌 창조성은 마음껏 살리고 그가 빠진 늪은 도저히 거기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신랄하게 지적한다. 설교비평에서 받는 전체적인 인상은 평자가 늘 건설적인 비평을 하고, 설교비평의 대상이 된 이들이 그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들의 설교가 더 발전할 것 같다는 확신을 주는 면이 많았다. 비평을 받은 이들은 비록 가혹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고마운 것은 비평에 애정이 있고, 인신공격 같은 저급한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평을 함께 읽어가는 독자들, 특히 설교자들은 같은 동역자들의 설교가 받는 비평을 그대로 자기의 설교를 향한 비평으로 얼마든지 활용하여 자신들의 설교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용기 있는 비평이다. 어떤 설교에 대해서는 과감히 그것이 “불량품”이라고, “반(反)복음적”이라고, 심지어는 “사기(詐欺)”이고, “사이비(似而非)”라고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설마 그러랴” 하겠지만 설교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제시하는 평자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이 설교비평은 평자나 비평을 받는 이나 다 같이 처음부터 실명(實名)을 사용하였다. 이 연재물이 매달 나가기를 세 해째 하고 있는 줄 아는데, 그동안 어떤 해당자들이 발행인이나 평자에게 무슨 명예훼손 같은 것을 법적으로 문제 삼는 일이 없었는지 걱정할 만큼 매회 치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자 자신이 한 때 말했듯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피하고, 공연한 덕담으로 지면을 매울 생각을 말며, 고담준론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리와 자유의 영에 사로잡혀 이 비평의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는 약속을 비교적 충실하게 지켰다. 평자는 일반적으로 설교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적한다. 장점이 장황하게 지적될 때는 뒤에 가서 반드시 그것을 상쇄할 것 같은 단점 지적이 쏟아진다. 비평의 대상이 되는 설교자들은 따가운 지적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그런 설교자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처럼 유익하고 건설적인 모니터링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종교개혁의 힘을 지녔다. 설교비평은 결국 그 설교를 하는 이들과 듣는 이들의 영성까지 비평하게 되는데,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무시하고 복음의 이름으로 인간의 탐욕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빚는 설교자나, 그것을 즐기는 청중들에 대한 어떤 지적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이런 종류의 설교비평이 지닌, 종교개혁까지 유도할 수 있는 폭발력과 파괴력을 감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라도 이런 종류의 설교비평은, 설교자만 다르고 지적 내용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설교가 계속되는 한 지속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평자 자신은 자기의 설교비평이 당랑거철(螳螂拒轍)일뿐이라고 개탄하기도 하지만 그의 평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설교를 반성하는 일반 설교자들은 이미 조용히 개혁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5. 설교비평의 방법과 비평 용어를 개발하였다. 한 편의 설교를 놓고, 혹은 한 설교자의 설교를 놓고 비평할 때, 요점을 지적하여 나타내 주는 개념들을 평자는 개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세이식 설교”, “나열식 설교”, “강해설교”, “정치설교”, “교회력의 실종”, “침묵하는 텍스트” “설교의 여운” “복음의 훼손” “종교버라이어티 쇼”, “반(反)복음”, ...... 이런 용어들은 좀더 정리가 되고 정의(定義)가 되면, 설교비평학의 전문용어로도 널리 활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6. 설교비평의 한 장르를 형성했다. 평자가 설교비평의 여기저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하게 보여주는 풍부한 신학적 유산, 성서 본문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穿鑿)의 열정, 세계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 등이 존경스럽다. 설교비평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의 복음이해, 영성 이해, 우리 설교자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모범적인 설교의 방향 등이 이미 우리의 평자에게서 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여러 특징들이 있기에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할 길”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비평의 장르를 형성했고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 독자는 평자의 고백적 진술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독자들은 비평의 대상이 된 설교자들에게서뿐만 아니라 평자 자신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자가 다른 이들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자신도 송두리째 독자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고백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할 때보다는 문제가 되는 설교자의 설교비평을 할 때, 그것이 왜 기독교의 설교일 수 없는지, 왜 복음적 설교일 수가 없는지를 비판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과정에서 평자는 자신이 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소중한 지혜와 지식을 독자들에게 거저 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비평의 질곡(桎梏)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설교비평이 개척해 가야할 수많은 소로(小路)들이 거대한 숲 속에 있음을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8. 기대되는 효과. 앞으로도 우리의 평자가 한국교회의 수많은 설교자들을 위해 이런 설교비평을 지치지 말고 해주기를 바란다. 필자가 기독교 계통 TV 방송을 시청하면서 확인 것으로, 대중 설교자 중 영향력이 큰 한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에 대한 우리 평자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적받은 사항에 대하여 변명을 하기는 하지만 바뀌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설교의 질은 설교자의 깨달음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마치 지혜처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혜, 그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에게 잠깐씩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설교비평이 줄곧 계속되어 비평 받는 설교자나 그 비평을 읽는 독자인 설교자들이 함께 큰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기를 평자에게 바란다. 평자는 한국교회 실천신학 특히 설교학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자에게 우리 모두 박수를 보낸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비평을 통해서 자신들의 설교를 반성하고 발전시키고 강단의 품위를 높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진리와 자유의 영이 역사할 수 있다면, 평자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과제
1. 설교자비평과 설교비평. 지금까지 나온 평자의 설교비평 양식(樣式)을 보면 독립된 한 작품으로서의 한 편 설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개 설교자의 설교 전반을 비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달랑 한 편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으로서는 부족할 것이다. 비평받는 그 설교자의 생애가 요약되기도 하고, 한 편의 설교가 아닌 그의 어떤 한 기간 동안의 설교들이 평자에 의해 발췌되면서 그 아무개의 신학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설교비평의 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로서 아무개의 설교의 경향을 밝히는 평은 될 수 있어도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매 설교 하나 하나의 본격 설교비평과는 다르다. 이러한 “설교자비평”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중요한 영역이 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설교비평”은 이런 경지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독자들로서는, 특히 설교자들인 독자들로서는, 다른 이들의 설교가 어떤 청중들에게 어떤 기회에 어떻게 선포되는지, 한 편으로 끝나는 그 한 설교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2. 평자가 지적하는 일관성 결여. 설교자들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선 저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한 설교자를 상대로 하여, 설교의 일관성 결여를 지적한 평자의 비평은 옳다. 때로는 단 한 편의 설교 안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설교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선포한 설교들, 같은 기간에 했다 하더라도 청중과 상황이 다른 설교들을, 평자가 종횡으로 비교하면서 신학의 일관성, 진술의 일관성, 성서해석의 일관성 등을 검토하게 된다면, 이것은 설교자가 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맞물린 상황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에 너그럽지 못한 평자의 엄밀한 척도 때문이다. 한 설교자가 한 곳에서 한 말을 다른 곳에서 달리 말한 것을 비평하는 것은, 단순 비교에서 상충과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보다는 그 배경에 대한 다양한 요인들을 분석하여 설교비평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보는 것도 설교비평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자가 지적한 문제가 되는 설교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강단을 떠나서, 청중이 바뀔 때는, 설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설교자의 설교인 것처럼 바뀌기도 한다. 그럴 경우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해놓고 여기 와서는 왜 이렇게 말하느냐 따지지 말고, 그 바뀐 설교 그 자체만 가지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메시지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일반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그 요인의 복잡성과 다양성, 타당성과 기만성 등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청중, 다른 상황에서 같은 메시지라도 달리 포장을 하는 설교자의 심리 같은 것도 분석하여 비판하거나 격려하거나, 그 설교자의 열린 가능성을 지적하거나 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3. 기독교의 본질. 이것은 축소되지 말고 확대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평자는 자주 복음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을 말할 때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로 돌아가서 그 최초의 것을 조명하려고 한다.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그가 자주 말하는 복음의 "해석"은 복음의 본질이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확대 해석이나 확대 적용을 허용한다. 타종교와의 차별성도 중요하지만, 종교적 공통 현상이라고 하여 반드시 비순수이거나 비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학적으로 보면 기독교도 한 종교인데 타종교와의 공통점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평자가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교회가 의료 상담 봉사 등을 포함한 사회사업에 몰두하는 것은 한 눈팔기가 아닌가 하고 묻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라오스 같은 공산국가의 교회들이 사회봉사에 치중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보려 하는 것은 사이비 구원이 아니라 그들로서는 하나님나라의 선포의 중요한 한 방식이다.
4. 설교비평의 기준. 설교는 정의(定義)할 수는 있어도 어떤 정의가 지배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비평하는 평자에게는 적어도 기독교의 설교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평자에게도 그런 설교비평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의 그러한 기준 설정은 필요하고 옳다고 본다. 그러니까 설교가 그러한 기준에서 빗나갈 때는 비평이 신랄할 수 있고, 듣는 이들을 설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이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설교가 그의 기준에서 빗나간 것과 같이 취급될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런 교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설교를 비평할 때는 그런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이런 연구가 다 설교비평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비평은, 복음적이다 아니다 하는 가치판단 이전에,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 다양성의 배경을 밝혀줄 의무가 있다. 기독교적이냐 비기독교적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독자 의 몫으로 넘겨도 된다.
5. 평자의 몫과 독자의 몫. 진리를 향한 외골수 정도(正道)를 고집하는 평자가 어떤 설교자의 일관성 결여를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옳다. 평자는 이 점에 있어서 존경받아 마당하다. 다만, 어떤 설교자가 사이비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음을 훼손하려고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면, 그가 하는 설교가 모순 덩어리이고, 때로는 평자가 이해한 복음에 반하는 설교로 들릴지라도, 언표(言表)된 말들을 끌어 모아 그것을 재편집하여 일관성 결여를 독자 앞에 폭로하면 독자들은 그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인 줄 알고, 그 설교자의 신실을 의심하게 되고, 그만큼 그 설교자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설교자이든 회중이든 다 사람이다. “설교비평”에서는 개별 설교를 비평하고 설교자 비평을 하지말자고 하는 것은 비평자와 독자의 몫을 구별하고, 설교 비평의 본 영역을 설교로 한정짓자는 말이다.
6. 외국인 설교자와 한국인 설교자의 비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한 개인 김 아무개 박 아무개의 강해 설교의 비교일 뿐이다. 영국 강해설교와 한국 강해설교의 우열이 여기에서 가려져서는 안 된다. 왜 그 유명한 영국 설교자의 전문적인 강해설교를 도저히 그와는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여러 일반 강해설교자들의 설교에 비교하여 한국교회를 폄(貶)하는가? 차라리 거꾸로 한국의 모범적인 강해 설교와 영국의 저질 강해 설교를 비교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시합은 어떤가? 그러나 평자로서도 그러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강해설교와 조직신학의 결합이 필요한 마당도 있고, 강해설교와 한국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마당도 있지 않은가! 성서 속의 신비한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조직신학적이기보다 시적일 수도 있다. 설교자가 무장하여야 할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지만 조직신학 신드롬이 가져오는 소모적인 논쟁도 두렵다. 평자는 그가 높게 평가한 한 설교자의 설교에서 조직신학적 주제를 지루하게 다룬 것이 있는데, 자칫 한가한 신학논쟁이 될 수도 있다.
7. 숨은 설교자들의 모범적 설교. 인물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설교비평이 극소수의 유명 설교자만을 다루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한계가 있다. 하나는 자칫 이 설교자들의 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 설교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어떤 전제를 은연중 독자에게 가지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더 많은 교회, 더 많은 강단의 설교자들은 한국교회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는 단 한 편도 읽거나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이들 스타 설교자들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간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이들 좋은 설교가 더욱 좋은 설교가 되기 위한 비평의 대상이 못 되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설교자들 중에는 목숨을 걸고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 동역자들은 잘 안다. 자신들이 그러하기 때문에 다른 설교자들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유추해서 알 수도 있다. 토요일 밤을 뜬 눈으로 새우는 설교자들, 같은 설교를 수없이 반복하는 초청 설교자들보다는 매주일 새로운 메시지를 준비하느라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설교자들, 평자는 그들에게도 “주님께서 무슨 말씀이 계셨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8. 설교 자료 비평.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라는 것이 어디 모범적인 것이 하나 딱 있어서 누구나 그것만 그대로 전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알고 있다. 여러 교단들이 목회자들을 위해 교회력에 따른 설교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 해의 설교를 한꺼번에 제공하거나 월별 혹은 계절별로 설교를 제공하기도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 못지않게 이런 설교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이 이러한 설교 자료가 설교비평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06년 5월호)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할 길
(민영진 박사)
공헌
1. 정성이 놀랍다. 단순히 설교 한 편을 놓고서 설교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집이 몇 권이든 그것을 가능한 한 다 읽는다. 설교자의 설교가 담겨져 있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비디오테이프나 녹음테이프가 있으면 그것을 다 보거나 듣는다. 설교 텍스트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으면 그것을 다 참고한다. 심지어 비평하려고 하는 설교자의 연출 언행 몸짓에서부터 그의 이력, 신학적 배경, 목회활동, 그가 섬기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관찰까지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간행물을 통하여 이런 설교비평을 할 경우 그는 거의 매달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정력을 오로지 한 설교자 관찰에만 다 쏟았을 것 같다. 이런 비평은 평자(評者 설교비평을 수행하는 이, 이 책의 저자)로서는 자기의 삶을 다 바치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작업일 터인데 속된 말로 그의 수고와 희생을 고려하여 연구비를 계산한다면 정상급 프로 선수의 연봉은 지불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만한 대우가 없었을 터이니, 아니 대우는 고사하고, 평자가 비평하는 설교자들로부터 또는 그 설교자들의 청중들로부터 평자 스스로가 미리 받아버리는 심리적 부담 또한 지독한 억압으로 체험되었을 것이니 그의 이런 노작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수년 동안 줄곧 성실하게 해 왔고 또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성이 놀랍다고 하는 것이다.
2. 비평과 치유가 함께 있다. 설교비평에서 다루어진 설교자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객관적이면서, 정중하고 진지한 때로는 비장한 설교비평을, 때로는 화가 날 만큼 솔직한 비평을, 그것도 일반 상식 수준에서가 아니라 그 설교자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한 전문 관찰자의 평을 듣게 된다. 아마도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한 편으로는 어떤 지적에 대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불쾌한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설교에 대하여, 비록 만족할 만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처럼 성실하게 비평하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설교비평에 오른 이들은 쓴 소리와 단 소리를 둘 다 듣게 된다. 설교자가 지닌 창조성은 마음껏 살리고 그가 빠진 늪은 도저히 거기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신랄하게 지적한다. 설교비평에서 받는 전체적인 인상은 평자가 늘 건설적인 비평을 하고, 설교비평의 대상이 된 이들이 그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들의 설교가 더 발전할 것 같다는 확신을 주는 면이 많았다. 비평을 받은 이들은 비록 가혹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고마운 것은 비평에 애정이 있고, 인신공격 같은 저급한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평을 함께 읽어가는 독자들, 특히 설교자들은 같은 동역자들의 설교가 받는 비평을 그대로 자기의 설교를 향한 비평으로 얼마든지 활용하여 자신들의 설교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용기 있는 비평이다. 어떤 설교에 대해서는 과감히 그것이 “불량품”이라고, “반(反)복음적”이라고, 심지어는 “사기(詐欺)”이고, “사이비(似而非)”라고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설마 그러랴” 하겠지만 설교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제시하는 평자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이 설교비평은 평자나 비평을 받는 이나 다 같이 처음부터 실명(實名)을 사용하였다. 이 연재물이 매달 나가기를 세 해째 하고 있는 줄 아는데, 그동안 어떤 해당자들이 발행인이나 평자에게 무슨 명예훼손 같은 것을 법적으로 문제 삼는 일이 없었는지 걱정할 만큼 매회 치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자 자신이 한 때 말했듯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피하고, 공연한 덕담으로 지면을 매울 생각을 말며, 고담준론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리와 자유의 영에 사로잡혀 이 비평의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는 약속을 비교적 충실하게 지켰다. 평자는 일반적으로 설교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적한다. 장점이 장황하게 지적될 때는 뒤에 가서 반드시 그것을 상쇄할 것 같은 단점 지적이 쏟아진다. 비평의 대상이 되는 설교자들은 따가운 지적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그런 설교자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처럼 유익하고 건설적인 모니터링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종교개혁의 힘을 지녔다. 설교비평은 결국 그 설교를 하는 이들과 듣는 이들의 영성까지 비평하게 되는데,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무시하고 복음의 이름으로 인간의 탐욕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빚는 설교자나, 그것을 즐기는 청중들에 대한 어떤 지적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이런 종류의 설교비평이 지닌, 종교개혁까지 유도할 수 있는 폭발력과 파괴력을 감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라도 이런 종류의 설교비평은, 설교자만 다르고 지적 내용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설교가 계속되는 한 지속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평자 자신은 자기의 설교비평이 당랑거철(螳螂拒轍)일뿐이라고 개탄하기도 하지만 그의 평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설교를 반성하는 일반 설교자들은 이미 조용히 개혁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5. 설교비평의 방법과 비평 용어를 개발하였다. 한 편의 설교를 놓고, 혹은 한 설교자의 설교를 놓고 비평할 때, 요점을 지적하여 나타내 주는 개념들을 평자는 개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세이식 설교”, “나열식 설교”, “강해설교”, “정치설교”, “교회력의 실종”, “침묵하는 텍스트” “설교의 여운” “복음의 훼손” “종교버라이어티 쇼”, “반(反)복음”, ...... 이런 용어들은 좀더 정리가 되고 정의(定義)가 되면, 설교비평학의 전문용어로도 널리 활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6. 설교비평의 한 장르를 형성했다. 평자가 설교비평의 여기저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하게 보여주는 풍부한 신학적 유산, 성서 본문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穿鑿)의 열정, 세계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 등이 존경스럽다. 설교비평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의 복음이해, 영성 이해, 우리 설교자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모범적인 설교의 방향 등이 이미 우리의 평자에게서 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여러 특징들이 있기에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할 길”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비평의 장르를 형성했고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 독자는 평자의 고백적 진술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독자들은 비평의 대상이 된 설교자들에게서뿐만 아니라 평자 자신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자가 다른 이들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자신도 송두리째 독자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고백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할 때보다는 문제가 되는 설교자의 설교비평을 할 때, 그것이 왜 기독교의 설교일 수 없는지, 왜 복음적 설교일 수가 없는지를 비판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과정에서 평자는 자신이 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소중한 지혜와 지식을 독자들에게 거저 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비평의 질곡(桎梏)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설교비평이 개척해 가야할 수많은 소로(小路)들이 거대한 숲 속에 있음을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8. 기대되는 효과. 앞으로도 우리의 평자가 한국교회의 수많은 설교자들을 위해 이런 설교비평을 지치지 말고 해주기를 바란다. 필자가 기독교 계통 TV 방송을 시청하면서 확인 것으로, 대중 설교자 중 영향력이 큰 한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에 대한 우리 평자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적받은 사항에 대하여 변명을 하기는 하지만 바뀌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설교의 질은 설교자의 깨달음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마치 지혜처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혜, 그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에게 잠깐씩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설교비평이 줄곧 계속되어 비평 받는 설교자나 그 비평을 읽는 독자인 설교자들이 함께 큰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기를 평자에게 바란다. 평자는 한국교회 실천신학 특히 설교학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자에게 우리 모두 박수를 보낸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비평을 통해서 자신들의 설교를 반성하고 발전시키고 강단의 품위를 높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진리와 자유의 영이 역사할 수 있다면, 평자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과제
1. 설교자비평과 설교비평. 지금까지 나온 평자의 설교비평 양식(樣式)을 보면 독립된 한 작품으로서의 한 편 설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개 설교자의 설교 전반을 비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달랑 한 편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으로서는 부족할 것이다. 비평받는 그 설교자의 생애가 요약되기도 하고, 한 편의 설교가 아닌 그의 어떤 한 기간 동안의 설교들이 평자에 의해 발췌되면서 그 아무개의 신학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설교비평의 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로서 아무개의 설교의 경향을 밝히는 평은 될 수 있어도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매 설교 하나 하나의 본격 설교비평과는 다르다. 이러한 “설교자비평”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중요한 영역이 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설교비평”은 이런 경지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독자들로서는, 특히 설교자들인 독자들로서는, 다른 이들의 설교가 어떤 청중들에게 어떤 기회에 어떻게 선포되는지, 한 편으로 끝나는 그 한 설교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2. 평자가 지적하는 일관성 결여. 설교자들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선 저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한 설교자를 상대로 하여, 설교의 일관성 결여를 지적한 평자의 비평은 옳다. 때로는 단 한 편의 설교 안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설교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선포한 설교들, 같은 기간에 했다 하더라도 청중과 상황이 다른 설교들을, 평자가 종횡으로 비교하면서 신학의 일관성, 진술의 일관성, 성서해석의 일관성 등을 검토하게 된다면, 이것은 설교자가 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맞물린 상황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에 너그럽지 못한 평자의 엄밀한 척도 때문이다. 한 설교자가 한 곳에서 한 말을 다른 곳에서 달리 말한 것을 비평하는 것은, 단순 비교에서 상충과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보다는 그 배경에 대한 다양한 요인들을 분석하여 설교비평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보는 것도 설교비평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평자가 지적한 문제가 되는 설교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강단을 떠나서, 청중이 바뀔 때는, 설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설교자의 설교인 것처럼 바뀌기도 한다. 그럴 경우 당신의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해놓고 여기 와서는 왜 이렇게 말하느냐 따지지 말고, 그 바뀐 설교 그 자체만 가지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메시지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일반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그 요인의 복잡성과 다양성, 타당성과 기만성 등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청중, 다른 상황에서 같은 메시지라도 달리 포장을 하는 설교자의 심리 같은 것도 분석하여 비판하거나 격려하거나, 그 설교자의 열린 가능성을 지적하거나 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3. 기독교의 본질. 이것은 축소되지 말고 확대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평자는 자주 복음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을 말할 때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로 돌아가서 그 최초의 것을 조명하려고 한다.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그가 자주 말하는 복음의 "해석"은 복음의 본질이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확대 해석이나 확대 적용을 허용한다. 타종교와의 차별성도 중요하지만, 종교적 공통 현상이라고 하여 반드시 비순수이거나 비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학적으로 보면 기독교도 한 종교인데 타종교와의 공통점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평자가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교회가 의료 상담 봉사 등을 포함한 사회사업에 몰두하는 것은 한 눈팔기가 아닌가 하고 묻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라오스 같은 공산국가의 교회들이 사회봉사에 치중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보려 하는 것은 사이비 구원이 아니라 그들로서는 하나님나라의 선포의 중요한 한 방식이다.
4. 설교비평의 기준. 설교는 정의(定義)할 수는 있어도 어떤 정의가 지배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비평하는 평자에게는 적어도 기독교의 설교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평자에게도 그런 설교비평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의 그러한 기준 설정은 필요하고 옳다고 본다. 그러니까 설교가 그러한 기준에서 빗나갈 때는 비평이 신랄할 수 있고, 듣는 이들을 설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이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설교가 그의 기준에서 빗나간 것과 같이 취급될 위험도 없지 않다. 그런 교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설교를 비평할 때는 그런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이런 연구가 다 설교비평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비평은, 복음적이다 아니다 하는 가치판단 이전에,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 다양성의 배경을 밝혀줄 의무가 있다. 기독교적이냐 비기독교적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독자 의 몫으로 넘겨도 된다.
5. 평자의 몫과 독자의 몫. 진리를 향한 외골수 정도(正道)를 고집하는 평자가 어떤 설교자의 일관성 결여를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옳다. 평자는 이 점에 있어서 존경받아 마당하다. 다만, 어떤 설교자가 사이비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음을 훼손하려고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면, 그가 하는 설교가 모순 덩어리이고, 때로는 평자가 이해한 복음에 반하는 설교로 들릴지라도, 언표(言表)된 말들을 끌어 모아 그것을 재편집하여 일관성 결여를 독자 앞에 폭로하면 독자들은 그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인 줄 알고, 그 설교자의 신실을 의심하게 되고, 그만큼 그 설교자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설교자이든 회중이든 다 사람이다. “설교비평”에서는 개별 설교를 비평하고 설교자 비평을 하지말자고 하는 것은 비평자와 독자의 몫을 구별하고, 설교 비평의 본 영역을 설교로 한정짓자는 말이다.
6. 외국인 설교자와 한국인 설교자의 비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한 개인 김 아무개 박 아무개의 강해 설교의 비교일 뿐이다. 영국 강해설교와 한국 강해설교의 우열이 여기에서 가려져서는 안 된다. 왜 그 유명한 영국 설교자의 전문적인 강해설교를 도저히 그와는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여러 일반 강해설교자들의 설교에 비교하여 한국교회를 폄(貶)하는가? 차라리 거꾸로 한국의 모범적인 강해 설교와 영국의 저질 강해 설교를 비교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시합은 어떤가? 그러나 평자로서도 그러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강해설교와 조직신학의 결합이 필요한 마당도 있고, 강해설교와 한국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마당도 있지 않은가! 성서 속의 신비한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조직신학적이기보다 시적일 수도 있다. 설교자가 무장하여야 할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지만 조직신학 신드롬이 가져오는 소모적인 논쟁도 두렵다. 평자는 그가 높게 평가한 한 설교자의 설교에서 조직신학적 주제를 지루하게 다룬 것이 있는데, 자칫 한가한 신학논쟁이 될 수도 있다.
7. 숨은 설교자들의 모범적 설교. 인물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설교비평이 극소수의 유명 설교자만을 다루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한계가 있다. 하나는 자칫 이 설교자들의 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 설교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어떤 전제를 은연중 독자에게 가지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더 많은 교회, 더 많은 강단의 설교자들은 한국교회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는 단 한 편도 읽거나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이들 스타 설교자들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간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이들 좋은 설교가 더욱 좋은 설교가 되기 위한 비평의 대상이 못 되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설교자들 중에는 목숨을 걸고 설교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 동역자들은 잘 안다. 자신들이 그러하기 때문에 다른 설교자들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유추해서 알 수도 있다. 토요일 밤을 뜬 눈으로 새우는 설교자들, 같은 설교를 수없이 반복하는 초청 설교자들보다는 매주일 새로운 메시지를 준비하느라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설교자들, 평자는 그들에게도 “주님께서 무슨 말씀이 계셨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8. 설교 자료 비평.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라는 것이 어디 모범적인 것이 하나 딱 있어서 누구나 그것만 그대로 전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알고 있다. 여러 교단들이 목회자들을 위해 교회력에 따른 설교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 해의 설교를 한꺼번에 제공하거나 월별 혹은 계절별로 설교를 제공하기도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 못지않게 이런 설교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이 이러한 설교 자료가 설교비평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06년 5월호)
2006.04.29 15:32:22
비평에 대한 비평. 이런 비평을 계속 주고 받아야 건강함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제 5번에서 너무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설교자 비평"에 보호막을 치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의 배경 없이는 그런 설교가 나올 턱이 없으니 설교자의 비평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는 설교비평의 목표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 행위를 하는 설교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비평없이 설교만 비평하면 그런 설교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제 5번에서 너무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설교자 비평"에 보호막을 치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의 배경 없이는 그런 설교가 나올 턱이 없으니 설교자의 비평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는 설교비평의 목표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 행위를 하는 설교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비평없이 설교만 비평하면 그런 설교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6.04.29 23:18:22
우익지 님의 코멘트에 저도 동의합니다.
글쓴이와 글은 뗄 수 없는 관계에요.
혹은 글 속에 글쓴이가 숨을 수도 있지요.
아무리 세련된 한편의 설교를 꾸려낼 수 있다고 해도
설교자의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그런 설교는 무의미한 거죠.
그래도 읽는 이의 느낌에 따라서
저의 글이 지나치게 설교자의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봅니다.
한국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죠.
어쨌든지 넓게 보시는 어른의 충고니까 잘 새겨들을 생각입니다.
글쓴이와 글은 뗄 수 없는 관계에요.
혹은 글 속에 글쓴이가 숨을 수도 있지요.
아무리 세련된 한편의 설교를 꾸려낼 수 있다고 해도
설교자의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그런 설교는 무의미한 거죠.
그래도 읽는 이의 느낌에 따라서
저의 글이 지나치게 설교자의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봅니다.
한국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죠.
어쨌든지 넓게 보시는 어른의 충고니까 잘 새겨들을 생각입니다.
2006.05.01 15:24:59
매월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챙겨보면서
설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소위 유명세를 탄 분들의 설교를 비평하시만,
사실 그 비평의 칼날은 저를 포함해서
한국 교회 대부분의 강단에
겨누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사들이
복음의 가치에로 치열하게 대면케 하는 목사님의 날카로운 비평에
누구도 자유롭지 않을테니까요.
이런 뜻에서 민영진 목사님께서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이
종교 개혁적 힘을 지녔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나의 한 근원을 이루는 자아중심적 원심력을 꿰뚫어 보면서
영적 실재라는 또 다른 중심을 향해
그분께 동의하고 지향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 인간의 사색적 자아나 삶의 자리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왜 그렇게 어렵고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논리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목사님의 글이
그곳에 머물지 않고
철저하게 영적 생명력, 초월로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제게는 큰 감동입니다.
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이런 직관적 인식, 혹은 관상적 삶의 자세에
깊은 신뢰가 갑니다.
목사님, 힘내십시요!
설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소위 유명세를 탄 분들의 설교를 비평하시만,
사실 그 비평의 칼날은 저를 포함해서
한국 교회 대부분의 강단에
겨누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사들이
복음의 가치에로 치열하게 대면케 하는 목사님의 날카로운 비평에
누구도 자유롭지 않을테니까요.
이런 뜻에서 민영진 목사님께서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이
종교 개혁적 힘을 지녔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나의 한 근원을 이루는 자아중심적 원심력을 꿰뚫어 보면서
영적 실재라는 또 다른 중심을 향해
그분께 동의하고 지향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 인간의 사색적 자아나 삶의 자리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왜 그렇게 어렵고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논리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목사님의 글이
그곳에 머물지 않고
철저하게 영적 생명력, 초월로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제게는 큰 감동입니다.
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이런 직관적 인식, 혹은 관상적 삶의 자세에
깊은 신뢰가 갑니다.
목사님, 힘내십시요!
2006.05.01 23:38:12
첫눈 님,
저에게 힘을 주시는군요.
설교비평 작업이 정말 재미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간혹 힘을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계속할만한 일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 글빨이 시원치 않아지면
언제라도 말씀 좀 주세요.
설교비평도 상투성에 빠질 염려가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군요.
설교비평 작업이 정말 재미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간혹 힘을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계속할만한 일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 글빨이 시원치 않아지면
언제라도 말씀 좀 주세요.
설교비평도 상투성에 빠질 염려가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2006.06.04 09:24:37
민영진 박사님의 설교비평애 관한글 잘 읽었습니다. 본 사이트에 와서 많은 은혜도 받고 생각하는 폭도 깊어졌습니다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생기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그 안타까움이란 것이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이나 민영진 박사님의 글이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이 성서텍스트이며 그 분문의 바른 의미를 가르치는 것 임을 주장 하면서도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인문학적 용어와 인문학적인 접근이 이루어 진다는 것 입니다.
위의 글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지울수 없습니다.
위의 글 "5. 평자의 몫과 독자의 몫...."이하의부분을 보면 민영진 박사님의 성경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내는 글이라 생각 합니다. 과연 설교비평의 시작은 어디 일까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의 큰 흐름이 "설교비평"이라고 보면 무리가 있을까요?
우리는 왜 설교 비평을 하는 것 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설교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교훈)을 지적하고 성도들을 바른 설교로 교훈하여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 그 목적일 것입니다.
한줄로 요약하면 잘못된교훈을 지적하는 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여러각도에서 조명해 볼수 있지만 "설교비평"이란 측면을 위주로 잠시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시각을 발견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초의 사람이자 성도인 "아담과 하와" 앞에는 바른 교훈과 잘못된 교훈이 있었습니다.
바른 교훈은 "먹는 날에는 정령 죽는다" 라는 말씀 이었고
잘못된 교훈은 "결코 죽지않는다"는 사단의 속삭임 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구약교회시대인 이스라엘 백성 앞에도 바른 설교와 바르지 못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서로 부터 말라기서까지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바른 설교와 거짓선지자들의 자못된 설교가 있었으며,
초림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로 대표되는 잘못된 설교와 가르침과 이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예수님의 바른 설교,교훈,가르침이 있었던 것 입니다..
이처럼 설교비평은 성경적으로 성경의 중심축 이었다고 볼수 있을만큼 뿌리가 깊은 것 입니다.
이러한 배경하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민박사님의 본문을 보면 성경의 흐름속에 있는 "설교비평"의 본질을 민박사님이 간과하고 계심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민박사님은 본문에서 " 어떤 설교자가 사이비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음을 훼손하려고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적으로 설교잘못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입니다. 민박사님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초림당시의 잘못된 교훈으로 백성을 이끌었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을 두고 "뱀들아 독사의 00 들아"라고 표현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하고 계시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 입니다.
우리들은 "뱀과 독사의 00"가 되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 당대의 얼말나 경건한 신앙인 이었는지를 신학자라면 잘 알것 입니다. 그들의 지금은 목사들은 비교 할 수도없을 만큼 철저한 신앙인이요 목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요한과 예수로 부터 "뱀들아 독사의 00"소릴 들을 수 있다면, 지금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 재대로 전하지 못하는 목사님들은 당연이 뱀과 독사의 00가 되는 것 입니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성경의 관점과 시각은 인문학적 사유나 사고나 철학으로 그 언어의 뉘앙스가 전혀 이해되질 않는다는 생각 입니다. 민박사님같은 뛰어난 분의 글속에 나타난 성경의 언어에 대한 이해부족은 참으로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 안타까움이란 것이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이나 민영진 박사님의 글이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이 성서텍스트이며 그 분문의 바른 의미를 가르치는 것 임을 주장 하면서도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인문학적 용어와 인문학적인 접근이 이루어 진다는 것 입니다.
위의 글에서도 그러한 느낌을 지울수 없습니다.
위의 글 "5. 평자의 몫과 독자의 몫...."이하의부분을 보면 민영진 박사님의 성경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내는 글이라 생각 합니다. 과연 설교비평의 시작은 어디 일까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의 큰 흐름이 "설교비평"이라고 보면 무리가 있을까요?
우리는 왜 설교 비평을 하는 것 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설교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교훈)을 지적하고 성도들을 바른 설교로 교훈하여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 그 목적일 것입니다.
한줄로 요약하면 잘못된교훈을 지적하는 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여러각도에서 조명해 볼수 있지만 "설교비평"이란 측면을 위주로 잠시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시각을 발견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초의 사람이자 성도인 "아담과 하와" 앞에는 바른 교훈과 잘못된 교훈이 있었습니다.
바른 교훈은 "먹는 날에는 정령 죽는다" 라는 말씀 이었고
잘못된 교훈은 "결코 죽지않는다"는 사단의 속삭임 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구약교회시대인 이스라엘 백성 앞에도 바른 설교와 바르지 못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서로 부터 말라기서까지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바른 설교와 거짓선지자들의 자못된 설교가 있었으며,
초림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로 대표되는 잘못된 설교와 가르침과 이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예수님의 바른 설교,교훈,가르침이 있었던 것 입니다..
이처럼 설교비평은 성경적으로 성경의 중심축 이었다고 볼수 있을만큼 뿌리가 깊은 것 입니다.
이러한 배경하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민박사님의 본문을 보면 성경의 흐름속에 있는 "설교비평"의 본질을 민박사님이 간과하고 계심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민박사님은 본문에서 " 어떤 설교자가 사이비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음을 훼손하려고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적으로 설교잘못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예수의 추종자 탈을 쓰고 강단을 점령한 악마의 하수인"입니다. 민박사님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초림당시의 잘못된 교훈으로 백성을 이끌었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을 두고 "뱀들아 독사의 00 들아"라고 표현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하고 계시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 입니다.
우리들은 "뱀과 독사의 00"가 되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 당대의 얼말나 경건한 신앙인 이었는지를 신학자라면 잘 알것 입니다. 그들의 지금은 목사들은 비교 할 수도없을 만큼 철저한 신앙인이요 목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요한과 예수로 부터 "뱀들아 독사의 00"소릴 들을 수 있다면, 지금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 재대로 전하지 못하는 목사님들은 당연이 뱀과 독사의 00가 되는 것 입니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성경의 관점과 시각은 인문학적 사유나 사고나 철학으로 그 언어의 뉘앙스가 전혀 이해되질 않는다는 생각 입니다. 민박사님같은 뛰어난 분의 글속에 나타난 성경의 언어에 대한 이해부족은 참으로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2006.06.04 10:23:07
제가 느낄 때,
코람데오님은 지금 너무 심각하게 깊이 들어가신것 같습니다.
설교비평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가르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유익이 생기게 될 것이지만
일단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설교를 객관화 해 본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의 설교지만 그 비평을 보면서 자기 설교를 객관화 해 보는
그래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노력도 하고
뭐 그렇게 보다 바른 설교(성경적)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설교자도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성도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신앙의 내용들을 인문학적 언어들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 내용이 인문학적인 것으로 채워지면 않되겠지만
그 언어와 포장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인문학적인 것을 피할 수 없겠지요.
만약 그것이 거부 된다면 굳이 신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겠죠.
코람데오님은 지금 너무 심각하게 깊이 들어가신것 같습니다.
설교비평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가르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유익이 생기게 될 것이지만
일단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설교를 객관화 해 본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의 설교지만 그 비평을 보면서 자기 설교를 객관화 해 보는
그래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노력도 하고
뭐 그렇게 보다 바른 설교(성경적)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설교자도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성도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신앙의 내용들을 인문학적 언어들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 내용이 인문학적인 것으로 채워지면 않되겠지만
그 언어와 포장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인문학적인 것을 피할 수 없겠지요.
만약 그것이 거부 된다면 굳이 신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겠죠.
2006.06.05 12:35:27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비평은 참으로 많은 여운을 남기며 앞으로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려가는 소망스런 건전한 조짐이라 생각 되여 짐니다.
다만 저에 생각에는 민 영익박사님의 평은 요즘 한국 교단에 복음의 본질의 회손일 뿐 아니라
그 심각성에 폐해를 조금도 느껴보지못한 분갇다는 아쉬움이 듬니다.
물론 그런 으미가 아니였 으리라고 생각을 접어보면서도 과제 5번의 느슨한 척도는
오히려 정목사님의 외로운길에 더깊은 격려가 필료하지 않나 생각을해봅니다.
지평을 열려가는 소망스런 건전한 조짐이라 생각 되여 짐니다.
다만 저에 생각에는 민 영익박사님의 평은 요즘 한국 교단에 복음의 본질의 회손일 뿐 아니라
그 심각성에 폐해를 조금도 느껴보지못한 분갇다는 아쉬움이 듬니다.
물론 그런 으미가 아니였 으리라고 생각을 접어보면서도 과제 5번의 느슨한 척도는
오히려 정목사님의 외로운길에 더깊은 격려가 필료하지 않나 생각을해봅니다.
2006.06.06 00:17:42
민영진 박사님의 "과제 5"를 읽어보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의 자리"에 대한 고민이 엿보입니다. 사실상 "과제 5"는 "과제 1"과 연결되어 있구요. 좀 비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사람 없다는 점에서, 저는 민영진 박사님의 말씀에 어느정도 동감합니다.
사람에 대한 얘기가 안 들어갈 수는 없지만, 사람 얘기가 너무 직접적이면 불필요한 상처와 오해가 생길 수 있거든요. 개혁도 중요하지만, "나와 다르고 미운 사람과도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설교비평에서 설교자비평이 안 들어갈 수야 없겠지만 설교자비평이 초점이 아닌 설교비평이 초점이 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겠지요. 설교비평에 초점을 맞춘 설교비평도 못받겠다는데, 설교자비평이 너무 전면에 등장하면 당근 실존이 감당못한다는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정목사님을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네오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픈 마음도 담겨있는 것 같구요. 결국, 설교비평(설교 본문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굳이 설교자에 대한 비평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알아들을 사람들은 다 듣겠지요.
아무튼, 설교자 커뮤니티에 내던져진 설교자님들께서 장렬히 전사당하지 마시고 살아남으셔서, 닮지 않으려 했던 그 모습을 닮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받는 그런 설교자들로 자라가시길 바랍니다.
사람에 대한 얘기가 안 들어갈 수는 없지만, 사람 얘기가 너무 직접적이면 불필요한 상처와 오해가 생길 수 있거든요. 개혁도 중요하지만, "나와 다르고 미운 사람과도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설교비평에서 설교자비평이 안 들어갈 수야 없겠지만 설교자비평이 초점이 아닌 설교비평이 초점이 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겠지요. 설교비평에 초점을 맞춘 설교비평도 못받겠다는데, 설교자비평이 너무 전면에 등장하면 당근 실존이 감당못한다는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정목사님을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네오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픈 마음도 담겨있는 것 같구요. 결국, 설교비평(설교 본문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굳이 설교자에 대한 비평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알아들을 사람들은 다 듣겠지요.
아무튼, 설교자 커뮤니티에 내던져진 설교자님들께서 장렬히 전사당하지 마시고 살아남으셔서, 닮지 않으려 했던 그 모습을 닮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받는 그런 설교자들로 자라가시길 바랍니다.
2006.06.07 23:07:04
책 발간하고 빚만 잔득 늘어난 개척교회 목사님 글중 하나 올려 드립니다^^
구약의 역사에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즉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하여 오고 있음에도 심판의 경고를 발하지 못한 몰각한 목자들(사 56:11)인 평화를 예언하던 거짓 선지자들(미 3:5)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 된 특권 타령을 하면서 ‘우리는 구원받은 민족이요, 축복받은 민족이요, 그래서 어떤 대적에게도 승리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백성들에게 '평안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이라'고 하였으며,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렘 23:17)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이 가장 모욕감을 느낄 때가 언제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 때일 것입니다. 아내가 가장 모욕감을 느낄 때가 언제겠습니까? 그 또한 남편이 '당신만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자를 사랑했을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과 성을 다하여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더불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책망의 말씀을 선포하지는 못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과 형통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참된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회개의 촉구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한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습니다.
종말로 신약의 교회에서도 그들의 반열을 따라서(요 8:44),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인들에게,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어버린 교인들에게,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교인들에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경고를 알리지 못하는 몰각한 목자들, 회개를 촉구하지 못하고 언제나 평화만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교인 된 특권의식 아래서 축복을 외치고, 문제 해결을 외치는 기복주의에 젖은 복술의 거짓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알아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면 반드시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내 신앙이 살았다고 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실상은 죽어버린 신앙이라면 반드시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내 신앙이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여 미지근하다면 반드시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분별해야 될 것은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한 고성방가의 몸 뜨거워짐이 열렬한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이파리 신앙, 자기만을 위한 이파리 예배, 자기만을 위한 이파리 기도는 신앙이 아니고, 예배가 아니고, 기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과 기도의 열매는 '하나님나라와 의'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백성들은 축복 타령, 해결 타령을 외치는 거짓 목자들의 예언에 '아멘! 아멘!' 하면서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장3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세상을 훨씬 더 사랑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성령의 책망과 권고를 거스르는 강퍅한 백성들에게 평강 타령이 웬 말입니까? 이제 우리 결연한 의지로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서 이들 사악한 뱀의 계보들(요 8:44)을 발본 색출하여 추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일컬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사 1장21~22절, 25~27절)
종이 종다워질 수 있음은 인간적인 인격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학식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교회 크기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교인 숫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할 수 있을 때일 것입니다.
개잡는집 2층 김나사로 목사의 [광야에서 부르는 하늘과 땅의노래 그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구약의 역사에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즉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하여 오고 있음에도 심판의 경고를 발하지 못한 몰각한 목자들(사 56:11)인 평화를 예언하던 거짓 선지자들(미 3:5)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 된 특권 타령을 하면서 ‘우리는 구원받은 민족이요, 축복받은 민족이요, 그래서 어떤 대적에게도 승리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백성들에게 '평안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이라'고 하였으며,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렘 23:17)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이 가장 모욕감을 느낄 때가 언제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 때일 것입니다. 아내가 가장 모욕감을 느낄 때가 언제겠습니까? 그 또한 남편이 '당신만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자를 사랑했을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과 성을 다하여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더불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책망의 말씀을 선포하지는 못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과 형통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참된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회개의 촉구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한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습니다.
종말로 신약의 교회에서도 그들의 반열을 따라서(요 8:44),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인들에게,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어버린 교인들에게,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교인들에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경고를 알리지 못하는 몰각한 목자들, 회개를 촉구하지 못하고 언제나 평화만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교인 된 특권의식 아래서 축복을 외치고, 문제 해결을 외치는 기복주의에 젖은 복술의 거짓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알아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면 반드시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내 신앙이 살았다고 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실상은 죽어버린 신앙이라면 반드시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내 신앙이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여 미지근하다면 반드시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분별해야 될 것은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한 고성방가의 몸 뜨거워짐이 열렬한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이파리 신앙, 자기만을 위한 이파리 예배, 자기만을 위한 이파리 기도는 신앙이 아니고, 예배가 아니고, 기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과 기도의 열매는 '하나님나라와 의'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백성들은 축복 타령, 해결 타령을 외치는 거짓 목자들의 예언에 '아멘! 아멘!' 하면서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장3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세상을 훨씬 더 사랑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성령의 책망과 권고를 거스르는 강퍅한 백성들에게 평강 타령이 웬 말입니까? 이제 우리 결연한 의지로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서 이들 사악한 뱀의 계보들(요 8:44)을 발본 색출하여 추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일컬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사 1장21~22절, 25~27절)
종이 종다워질 수 있음은 인간적인 인격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학식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교회 크기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교인 숫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할 수 있을 때일 것입니다.
개잡는집 2층 김나사로 목사의 [광야에서 부르는 하늘과 땅의노래 그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민영진 박사님이 쓰신
저희 <설교비평>에 대한 비평입니다.
저는 이번 기독교 사상 5월호에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기상에서는 대신 민영진 박사님의 글을 올렸습니다.
원로급 목사님께서 저의 글에 대한 평을 주신 것인데,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혹시 독자들에게 참고가 될까 해서
여기 '설교비평' 메뉴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