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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소년의 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세상살이의 온갖 시련을 겪던 한 소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 어린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열세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은혜 속에 사는 신비를 체험하며 살았다.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판잣집에 살아도 놓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도 괜찮았다. 공납금을 못 내도 아무 근심 걱정이 없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만큼 은혜는 좋은 것이었다. 은혜 충만은 내 몸과 마음을 주장했고, 그 충만한 은혜 덕에 내 몸과 마음은 빛이 났다.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두란노, 2005년. 이하 ‘무릎’)
중학교 입시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할 그 시기에 이 소년은 한강 모래사장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쫓아다녔으며, 철야기도를 했고, 은혜를 받으면서 “눈물, 콧물 흘리며 밤새 회개기도”를 드리곤 했다. 학급에서 노래 부를 기회가 되면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318장)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186장)를 부를 정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심취해서 살았다. 그때부터 친구들은 이 소년을 ‘정 목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소년이 바로 현재 수영로교회의 담임이신 정필도 목사님이시다.(이하 ‘정 목사’)
평자는 정 목사의 간증을 담은 책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를 읽으면서 그는 타고난 전도자이며, 설교자이고,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불과한 소년 정 목사는 “우리 반 친구들 전원이 예수 믿도록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친구들을 교회로 데리고 갔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직접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이 소년은 그때부터 야무진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나라 백성들을 몽땅 예수 믿게 해야 되겠다.”(무릎 32)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늘 그렇듯이 그의 목표도 원래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 가장 큰 낙이요, 기쁨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돈 잘 버는 판검사가 되기보다는 온 나라 사람들을 예수 믿도록 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나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를 갈 수 있다면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나온 뒤에 신학교를 가서 목사 안수를 받겠다.(무릎 41)
이 소년은 자기의 계획대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급기야 서울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대원을 나왔다. 그가 정식 교회 사역자로 나서서 처음 맡은 부서는 학생회였는데, 60명에 불과했던 중고등부를 3개월 만에 200 명 이상의 학생회로 키웠다.(무릎 114) 공군 군목 시절 일월산에 있는 부대의 모든 장병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급기야 1975년 6월1일 집사 두 가정, 여 전도사 한 분과 함께 개척한 수영로 교회를 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년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꿈이 이렇게 큰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정 목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민족복음화의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 50 여년이 지난 오늘도 정 목사는 그 꿈을 접지 않았다. 수영로교회 안에 1만 개의 소그룹을 만들고, 5백만 부산시민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50만 영혼을 책임지며, 5천 명의 해외 선교사 파송을 21세기의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오늘도 그는 여전히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보통사람들’을 위한 설교(?)
소년시절부터 육십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복음전도의 꿈을 키워온 정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기 위해서 평자는 위에서 인용한 정 목사의 간증서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외에 <하나님의 사람>(이하 ‘하나님’)과 요한복음 강해 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하 ‘자녀’), 요한복음 강해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하 ‘자유’), 그리고 수영로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 목사의 설교문(2005년 10월30일-2006년 5월7일)을 꼼꼼히 읽었으며, 동영상도 필요에 따라서 시청했고, 몇몇 잡지에 실린 정 목사의 대담과 짧은글들도 참조했다.
우선 홈페이지에 올라온 주일공동예배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당 은혜홀을 가득채운 신자들이 감격적으로 예배드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평자는 아직 그렇게 큰 예배에 참석해본 적이 없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대형 프로젝터가 강단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매머드 교회당에서 그렇게 많은 청중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며, 한마음으로 기도드리고,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로 교회는 작년부터 5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교역자로는 당회장인 정 목사를 비롯해서 41명의 부목사, 5명의 강도사, 15명의 전도사, 8명의 교육전도사가 사역하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만 몇 천 명씩 모인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크기를 자랑하는 교회이다.
예배 분위기에 압도당한 평자는 정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전반적인 예배 분위기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설교는 청중들을 사로잡을만한 세련미는 둘째 치고 지나치게 평범하게 보여서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발음도 경우에 따라서 어눌하고, 설교하는 태도도 역시 초보자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평자의 마음을 끌어들일만한 게 거의 없었다. “말씀중심의 교회”를 가장 중요한 목회철학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설교가 목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80%에 이른다고 강조하는(그말씀 2005년11월호) 정 목사의 설교가 왜 이렇게 평범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동진 선교학연구소장은 이 대목을 평자의 생각과는 다른 뉘앙스로 이렇게 해명했다. “그의 설교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설교였다. 그는 항상 단순하고 가장 무식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했다. 어려운 용어나 지식의 말을 결코 쓰지 않았다.”(월간목회 2006년 5월) 어쩌면 그의 평가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알아듣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실제로 구름떼처럼 많은 청중들이 매주일 정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몰려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설교에 무언가 청중을 끄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 평자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행사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설교가 ‘별로’로 보인다는 이 해괴한 상황에 빠져버리고 만 셈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오늘 설교비평의 숙제다.
우선 평자는 독자들에게 정 목사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적절한 한 편의 설교를 소개하겠다. “선택과 기회”라는 제목의 설교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갈 5:13-15)는 바울의 편지를 본문으로 한다.(하나님 78-92) 정 목사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설화를 인용하면서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말로 이 설교의 문을 열었다. 사실 이 본문은 선택의 중요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할례주의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한 설교자는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율법의 진수인 할례와의 관계를 통해서 참된 자유의 본질을 설명해나가야 하는데 이 설교는 출발부터 성서 텍스트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정 목사는 선택의 중요성을 언급한 다음에 잘못된 선택이 큰 불행을 부른다는 주제로 넘어간다. 물론 이런 주제도 오늘의 본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불행을 당한 성서의 예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첫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를 택하는 대신 원망을, 찬양하는 대신 불평을, 순종하는 대신 불순종” 선택했으며, 결국 그들은 “불행하게” 되었다. 둘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판단을 잘못하고 선택을 잘못해서” 결국 작고 약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셋째,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바알 신을 선택함으로써 큰 불행을 당했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소돔을 선택했기 때문에 불행한 민족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 다섯째, 어리석은 부자도 재물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평자는 지금 정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하려는 건지 종잡기가 힘들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선택의 예를 들기 시작하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을 그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정 목사의 설교는 이제 두 번째 큰 주제로 넘어간다. 선택을 잘 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다섯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모세, 나아만. 정 목사는 성서가 영웅들의 선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내용들은 성서 텍스트의 변죽을 울리는 것이었지만, 어쨌든지 잘못된 선택과 잘된 선택을 구분했다면 그것만으로 설교는 끝날 수 있으며, 당연히 끝나야만 했다. 여기서 신자들은 이미 선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목사는 그 순간에 또 다시 “믿음으로 선택하면 축복받고 성공한다.”는 주제로 달려간다. 좋은 선택을 한 믿음의 사람들을 설명할 때 이미 제시된 그 내용을 그는 또 하나의 주제로 삼았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받고 성공합니다.” 하고 주장하더니 우리가 선택할 때 성령과 악령이 영향을 준다는 주제를 다시 끌어들인다. 선택의 중요성을 앞에서 언급한 마당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마당에 또 다시 성령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의 설교가 얼마나 산만하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은 선택을 위한 3가지 방법”이 다시 제시된다. 그야말로 이 설교 구조는 옥상옥이다. 세 가지 방법이 무엇인지는 웬만큼 눈치가 있는 독자라면 이미 짐작이 갈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는 게 그 방법이다. 이 설교는 여기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는다. 선택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모든 기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로 삼는 사람과 모든 기회를 사랑을 베풀 기회로 삼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설교의 마무리는 이렇다. “선택을 잘하면, 좋은 날이 찾아옵니다. 행복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생 선택 잘하시기를 바랍니다.”(하나님 92)
평자에게 인내심이 부족한 탓인지 영성이 매마른 탓인지, 그의 설교를 읽거나 들으면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다. “중언부언”(마 6:7)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내용적으로 동어반복에 불과한 설교를 듣고 어떻게 영적인 평화와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산만한 설교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는 이 현상이 평자에게는 놀라울 뿐이다.
성서 텍스트의 파괴
혹시 독자들 중에서 평자가 정 목사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일부만을 침소봉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설교가 위에서 인용한 설교와 비슷한 패턴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게 아니다. 이제 우리의 궁금증은 그의 설교가 그렇게 산만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예로 든 설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정 목사가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는 성서 텍스트에 놓여 있는 ‘삶의 자리’를 파괴한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이런 문제는 평자가 다른 글에서도 몇 번에 걸쳐 강조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 목사가 2006년 3월19일 주일에 전한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구약 시편 67:1-5절을 본문으로 한다. 시편 67편이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제 찬송이라는 사실은 6절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 목사는 5절까지만 본문으로 삼았으며, 결과적으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와는 전혀 다른 설교를 했다. 시편 기자는 추수감사제를 맞아 근동의 종교처럼 자연숭배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찬양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이런 본문을 읽는 설교자는 당연히 척박한 생활 조건 가운데서도 생존을 보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고대 이스라엘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충분하게 풀어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대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성서 텍스트의 근본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이 텍스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니 찾는다기보다는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한 자기의 주관적 상식만을 전하려고 애를 썼을 뿐이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정도로 사용하고 자기의 학문이나 철학, 사상을 전달하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분이(자유 16) 스스로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물론 먼 길을 돌아간다면 이 본문으로 그런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의 성서 텍스트 적용은 전형적인 아전인수이다. 정 목사가 이 본문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천천히 따라가자.
정 목사는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열거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의미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물론 몇몇 예화를 들면서, 그것도 문맥에 맞지 않는 예화를 끌어들이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1.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2. 전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삽니다. 3.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일보다 영원한 그 나라를 항상 생각합니다. 4. 핑계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삽니다. 정 목사는 일반적으로 틀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추수감사 찬양이라는 시편 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설교를 했다. 이런 설교는 분명히 성서 텍스트를 살리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래도 청중들이 은혜만 받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말하지는 말자. 이러한 은혜 만능주의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영혼을 속병 들게 할 것이다.
한편의 설교만 더 확인하자. 2006년 1월1일 주일에 행한 설교 “예수님만 오시면”은 이사야 61:1-3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본문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신다는 이사야의 메시아론적 신앙고백이다. 정 목사는 예수님이 곧 인생의 마스터키와 같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모시면 죄인이 의인으로, 저주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으로, 절망의 사람이 소망의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꼭 필요한 사람으로, 슬픔의 사람이 기쁨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정 목사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2천 년 전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 세상은 그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설교자는 성서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놓인 긴장과 틈을 뚫고 들어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메시아인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성서의 메시지를 호도하고 있다.
위의 설교에서 그는 예수를 모시기만 하면 일어나게 될 아홉 가지 일들을 일일이 거론했다. 1)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2) 승리의 복을 받습니다. 3) 평안의 복을 받습니다. 4) 모든 저주를 속량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됩니다. 5) 치료의 복을 받게 됩니다. 6) 생명이 있습니다. 7) 존귀한 자가 됩니다. 8) 평강이 있습니다. 9)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있습니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 들이기만 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참 행복자가 됩니다. 올 한 해 주님을 모시고 사셔서 성공하시고 행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용했던(눅 4:17 이하) 이사야 예언자의 이 본문을 일종의 행복예찬론으로 풀어내는 정 목사의 기발한 착상 앞에서 우리는 유구무언이다. 그는 이사야가 메시아적 희망을 품고 예언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포로 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되며, 또한 우리가 그들의 삶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본문을 선택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정 목사는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다. 정 목사의 깊은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설교에 나타난 현상만 본다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다만 형식적으로 그리스도교 예배와 설교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성서 텍스트를 선택할 뿐이다. 일종의 구색 맞추기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포장되어 있기만 하면 성서 텍스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오히려 파괴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오늘의 이 교회 현실이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다.
설교의 매너리즘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문제, 즉 설교의 산만성과 성서 텍스트의 파괴 이외에 그의 설교에는 복음적인 설교로서 위험한 크고 작은 요소가 적지 않다. 예컨대 선정적인 표현이 그중의 하나이다. 지면 관계로 맥락을 무시하고 몇 대목만 인용해보겠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은 ‘제가 일등으로 일억 바치게 해주세요.’ 어떤 사람은 ‘십등 안으로 헌금을 바치게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하나님 161)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수지맞습니다.”(하나님 215) “저도 십의 오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감동 안하시겠습니까?”(하나님 220)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입니다.”(하나님 268)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하나님 333)
이러한 선정적인 표현은 설교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정 목사가 인용하는 예화 내용의 선정성은 심각하다. 예컨대 2005년 11월13일 설교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벧전 2:1-3)에서 정 목사는 14년 동안 절의 총무로 활동하던 승려가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성서를 70번 정독한 뒤에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예화를 들었다. 그의 결론은 “이처럼 스님도 성경을 읽으면 은혜를 받습니다.”였다. 11월20일 설교에서는 청교도들이 북미대륙에 건너간 첫해에 드린 추수감사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셨기 때문에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는 예를 들었다. 이런 역사 이해가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얼굴값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정 목사는 아래와 같이 ‘화류계 여인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화류계 여인들 중에 못생긴 여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년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하나님 135)
지금 정 목사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는 중인지 평자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 자리에 정 목사의 표현대로 화류계에 종사하는 분이 앉아있었다면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성도의 얼굴”이라는 이 설교는 정 목사의 개인적인 관상학이지 설교라 할 수 없다.
이왕에 예화 문제가 나왔으니까 선정성만이 아니라 상투성에서도 크게 문제라는 점을 한번 짚어야겠다. 정 목사는 무슨 설교를 하든지 아브라함, 이삭, 요셉, 모세 같은 성서 인물들을 자주 인용한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현상인데, 설교의 본문인 성서 텍스트가 담고 있는 영적인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의 지평을 열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형식을 청중들에게 주입하기 위해서 신구약성서를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설교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또한 정 목사가 예로 드는 세속 인물들이 대개 록펠러, 크롬웰, 워싱턴,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수많은 재벌과 위인이라는 것은 그의 예화 적용이 상투적이라는 의미이다. 위인들 이외에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예화도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고 죽을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던 부인이 모든 걸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겼더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하나님 175) 군대에서 예수를 믿게 된 무당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가 어머니의 굿을 보고 주기도문을 외우자 굿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자녀 171) 본인으로서는 이런 예화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재탕, 삼탕으로 약발이 다 떨어진 찌꺼기와 같다. 이런 상투적인 예화들이 교회 강단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되면 결국 설교의 천박성은 피할 길이 없다. 이런 방식이 바로 보통사람들을 위한 설교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선정적이고 상투적인 정 목사의 예화 사용이 최근에 들어서 훨씬 그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과 2001년에 출판된 설교집에 비해 홈페이지 올라온 최근의 설교에는 훨씬 많은 예화가 남발되고 있었다. 그에게서 설교의 연조와 예화의 의존도가 정비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약 좋다 남용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2006년 2월12일의 설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고후 12:7-10)에 실린 예화를 간추려보자. 1) 원래 구두 수선공이었던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 이야기. 2) 건축 중인 교회를 둘러보다가 머리를 다쳐서 앓다가 죽은 사람. 3) 축구경기를 하다가 쓰러져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앓다가 죽은 어느 목사 이야기. 4)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의 자서전 이야기. 5) 소아마비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야기. 6) 미군 군인과 결혼한 한국 여자 이야기 7)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경구. 그 이외에도 성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2006년 3월19일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시편 67:1-5)에 다음과 같은 예화들이 등장한다. 1) 지나던 길에 얻은 전도지로 예수를 믿게 된 중국 청년 마징링 이야기. 2) 수족관에 일하는 청년의 간증. 3) 무디의 경구. 4)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선교하던 몰간 목사의 이야기. 이 설교에도 역시 그 이외에 수많은 성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편의 설교만 더 확인하자. 2006년 4월2일의 설교 “삶의 목적”(고전 10:31-33)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담고 있다. 1) 알로피셔(alopecia)라는 탈모증에 걸렸던 록펠러 이야기. 2) CCC 창립자인 빌 브라이트. 3) 일제시대에 황해도에 살면서 십일조를 잘했던 이찬영 장로. 4)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팔다가 망해버린 프레몽트르 수도원. 5) 새로 부임하여 7백명의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만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고백하는 젊은 목사 이야기. 이런 정도면 정 목사의 설교는 설교인지 예화모음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수영로교회에 전문적으로 예화를 수집하는 부 목사가 활동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예화가 시와 때도 없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서 텍스트의 비중이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은 그의 설교가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는 증거이다.
설교의 폭력성
정 목사의 설교가 산만하건 말건, 성서 텍스트를 파괴하건 말건, 예화의 과잉으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져있건 말건 상관없이 수영로교회는 한국의 어느 교회도 쉽게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교회성장은 목사의 설교와 상관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정 목사는 이런 설교의 한계를 넘어설만한 목회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런 현상을 종합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은 설교비평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내막을 뚫어볼만한 영적인 통찰력이 평자에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도에서 대충 글쓰기를 끝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요소들을 합한 것보다 훨씬 불량하게 보이는 문제점만은 마저 짚어야겠다. 이 문제점은 비단 정 목사만이 아니라 한국의 여러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며, 또한 어떤 점에서는 위의 궁금증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이렇게 마지막 자리로 미뤄졌다. 이제 어린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과자의 유해성을 밝혀낸다는 자세로, 숨을 고르면서 이 글쓰기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어보자.
평자의 생각에 한국교회에서 활동하는 대중적인 설교자들의 설교는, 모든 이들의 설교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공격적이며, 따라서 폭력적이다. 그런데 설교의 폭력성과 대중성 사이에는 모종의 은밀한 거래가 형성된다. 대중적 설교자들의 넘치는 자신감은 종교적 폭력성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심리적 약점에 토대하고 있으며, 설교자들을 향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그런 폭력성에 기대서 얻을 수 있는 종교적 대리만족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거래가 강화되면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비합리적 열광주의의 포로가 되고 만다. (설교의 공격성에 관해서는 장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졸고 “허무주의 영성”을 참조할 것. 기상 2005년2월)
그런데 목회와 설교의 폭력성은 대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설교자나 청중들이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랑을 입에 달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인류 역사에 행사한 폭력성을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벌인 큰 전쟁은 접어두고라도, 또한 우상타파라는 명분으로 벌인 마녀사냥은 접어두고라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일컬어진 청교도들의 배타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태도에 깃든 반생명적 요소도 역시 폭력이다. 주변의 중소형 교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십 대의 교회 버스를 운용하거나 대형 이벤트를 벌이면서 무조건적인 성장 프로그램을 밀어붙이는 대형교회의 행태도 역시 은폐된 폭력이다. 아니 그것은 노골적인 폭력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두는 게 좋겠다. 진화론자들과 동성애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사형폐지론자들과 자신들의 평화 지향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군 대체 복무를 요구하는 소종파 종교인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겨누면서, 경제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신자유주의와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가장 폭력적인 기질을 보이고 있는 미국을 향해서는 옹호 내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앞에서 평자의 이런 문제제기는 공연히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안타깝지만 정 목사의 설교도 이런 폭력적인 요소를 적지 않게 안고 있다. 평자의 이런 주장이 어떤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정 목사는 기본적으로 설교자의 은혜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에 관한 한 대담에서 “설교는 받은 은혜와 삶의 체험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은혜를 받아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과 상관없고 자신에게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설교는 죽은 것입니다.”고 밝힌 적이 있다.(그말씀, 2005년 11월호에서) 그가 강조하는 은혜와 평자가 지적하는 폭력성은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정 목사는 기본적으로 신자들을 착하다고 보는 인격적인 목회자이며 설교자이다. 직접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정 목사와 수영로 교회 신자들 사이에는 깊은 인격적, 신앙적 신뢰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뢰감이 수영로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의 하나로 작용하지 않을는지. 그런 마당에 평자가 정 목사의 설교를 폭력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평자에게 사리 판단력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어떤 비틀린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오해를 받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평자가 보기에 정 목사의 설교에 내재된 가장 결정적인 폭력성의 뿌리는 정 목사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 있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다보면 주님이 제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체험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습니다.(하나님 274)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도하고, 주님의 위로를 받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바른 삶의 태도이다. 그러나 정 목사가 주장하는 체험은 그런 일반적인 신앙의 태도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경지가 탁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와 관련된 그의 주장을 천천히 추적해 보자.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깊은 신앙을 체험한 그는 강도사 시험을 앞두고 비를 맞으며 바위 위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을 때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무릎 59) 이런 체험은 그의 목회 전반을 지배한다. 주일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뒷자리가 빈 걸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뒷자리가 비었네요. 빨리 심방하셔야겠어요. ... 제발 심방 좀 해 주세요.” 대표기도가 끝나자 곧 교인들이 몰려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그 장면에서 다시 기도했다. “주님, 수고하셨습니다.”(무릎 154) 그는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때마다 주님께 심방을 가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런 특별 기도를 한 다음에 어떤 신자는 정 목사를 찾아와 이렇게 간증한 적도 있다. “목사님, 그동안 교회에 못 나와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목사님이 나타나셨더라고요. 안 나올 수가 없어서 이렇게 교회 다시 나왔습니다.”(무릎 155)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는 이런 “기도와 응답”에 관한 간증으로 일관된다. 정 목사는 목회의 모든 문제를 주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그 응답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수영 로터리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이다. 교회 주차장이 부족해서 주일마다 간선도로에 세워둔 교인들의 차가 견인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정 목사는 이런 일로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강단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님, 주차장을 주세요. 주차장을 주세요.” 그날 밤 꿈속에서 주님은 “주차장을 주겠노라”고 응답하셨다. 그는 교인들에게 주님의 약속을 선포했다. “저 땅을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저 땅을 우리 교회가 매입하길 원하십니까? 원하시면 두 손 들어 ‘할렐루야’ 하십시오.”(무릎 61) 계약금만 내고 중도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 목사는 금식기도를 했으며, 주일 새벽에 주님이 이사야 45:2,3절 말씀으로 응답하셨다고 한다. 그 순간에 정 목사는 기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다 됐네요! 다 됐네요! 다 됐네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 주일 설교에서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간증했고, 다음날 교회 계좌로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2006년 5월7일, 어린이 주일 설교에서도 그는 1991년도에 있던 일을 전했다. 정 목사 가족들이 미국에서 생활한 다음에 세 남매를 그곳에 남겨두고 부부만 수영로 교회로 돌아오게 될 때의 이야기다. 자기들끼리만 남게 될 아이들이 걱정되어 악몽을 꾸기까지 한 정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청교도를 타락시킨 마귀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진을 치고 있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정 목사는 다음날 아침 세 남매에게 이런 주님의 음성을 전했다고 한다.
정 목사는 이러한 자신의 체험에 관한 주변의 우려 섞인 소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같은 교단의 목사님들이 정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소리로 들립니까? 소리가 납니까?” 하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정 목사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들어 보셔야 알죠.” 하고 대답한다.(무릎 134) 과연 그에게 일어나는 이런 경험의 실체는 무엇인가? 주님의 음성이 아람어로 들리는가? 한국어로 들리는가? 평자가 알기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은 대개 비현실적인,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나 아니면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잠정성
설교는 물론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주님의 뜻을 청중들에게 선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주님의 응답을 말하거나, 또는 문학적인 수사의 차원에서 주님의 음성 운운하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 목사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목회의 문제를 주님의 음성과 연결시킨다는 건 위험하다. 생각해보라. 교회의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서 목사의 생각을 반대하고 있는 신자들을 향해서 목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노라 하면, 그 공동체의 질서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만약 목사가 주차장이든, 복지관이든, 교회묘지이든 그런 것을 구입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면 신자들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해결해나가면 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주님의 응답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고 설교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평자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모르는 어리석음이거나 아니면 목회의 효율성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다.
이런 어리석음과 거짓말이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횡행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포함한 인간 역사의 잠정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데에 기인한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과 결단은 그것이 아무리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진정성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잠정성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판단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종말이 이르러야 확정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의 진리성은 유보된다. 이런 사실은 그렇게 오묘한 현학(玄學)을 통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날 주님의 뜻으로 확신했던 행위들이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역사적 실증들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도그마도 역시 이런 잠정성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말인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운명이, 곧 그의 부활이 종말에 일어나게 될 궁극적 생명 사건의 선취(先取)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성취(成就)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선취와 성취 사이의 현실인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성서 텍스트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적 전통과, 그리고 삶의 리얼리티를 읽을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해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부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의존적인 태도로, 즉 두려움과 떨림의 영성으로 말이다. 이것이 곧 자신의 신앙적 행위까지 상대적인 지평에 놓고 대신 하나님의 행위만을 절대적인 지평에 놓는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선포한다는 것은, 그래서 신자들이 그 설교자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게 유도한다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형성된 종교적 아우라(aura)는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발견되듯이 대중들의 영혼에 폭력적으로 행사될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런 폭력성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목회와 설교 현장은 “벌거벗은 임금” 우화와 닮아있다. 설교자와 평신도 지도자와 일반 신자들, 그리고 신학교수들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또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일조할 수도 있다. 누가 이 사태를 직시하고 외칠 것인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지금도 자신의 신앙경험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만을 드러내는 설교에 온 영혼을 불사르고 있을 믿음의 동지들에게 평자의 이야기가 우울한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서곡으로 들려지기를 바라면서, 이미 오래 전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하고 한국교회를 향해 세레나데를 불렀던 한 인문학자의 고언을 이 설교비평의 갈무리로 삼겠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 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간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뜩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 김영민, 한겨레21, 1999.4.15.>
(기독교사상, 2006년 6월호)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소년의 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세상살이의 온갖 시련을 겪던 한 소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 어린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열세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은혜 속에 사는 신비를 체험하며 살았다.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판잣집에 살아도 놓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도 괜찮았다. 공납금을 못 내도 아무 근심 걱정이 없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만큼 은혜는 좋은 것이었다. 은혜 충만은 내 몸과 마음을 주장했고, 그 충만한 은혜 덕에 내 몸과 마음은 빛이 났다.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두란노, 2005년. 이하 ‘무릎’)
중학교 입시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할 그 시기에 이 소년은 한강 모래사장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쫓아다녔으며, 철야기도를 했고, 은혜를 받으면서 “눈물, 콧물 흘리며 밤새 회개기도”를 드리곤 했다. 학급에서 노래 부를 기회가 되면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318장)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186장)를 부를 정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심취해서 살았다. 그때부터 친구들은 이 소년을 ‘정 목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소년이 바로 현재 수영로교회의 담임이신 정필도 목사님이시다.(이하 ‘정 목사’)
평자는 정 목사의 간증을 담은 책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를 읽으면서 그는 타고난 전도자이며, 설교자이고,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불과한 소년 정 목사는 “우리 반 친구들 전원이 예수 믿도록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친구들을 교회로 데리고 갔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직접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이 소년은 그때부터 야무진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나라 백성들을 몽땅 예수 믿게 해야 되겠다.”(무릎 32)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늘 그렇듯이 그의 목표도 원래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 가장 큰 낙이요, 기쁨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돈 잘 버는 판검사가 되기보다는 온 나라 사람들을 예수 믿도록 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나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를 갈 수 있다면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나온 뒤에 신학교를 가서 목사 안수를 받겠다.(무릎 41)
이 소년은 자기의 계획대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급기야 서울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대원을 나왔다. 그가 정식 교회 사역자로 나서서 처음 맡은 부서는 학생회였는데, 60명에 불과했던 중고등부를 3개월 만에 200 명 이상의 학생회로 키웠다.(무릎 114) 공군 군목 시절 일월산에 있는 부대의 모든 장병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급기야 1975년 6월1일 집사 두 가정, 여 전도사 한 분과 함께 개척한 수영로 교회를 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년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꿈이 이렇게 큰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정 목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민족복음화의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 50 여년이 지난 오늘도 정 목사는 그 꿈을 접지 않았다. 수영로교회 안에 1만 개의 소그룹을 만들고, 5백만 부산시민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50만 영혼을 책임지며, 5천 명의 해외 선교사 파송을 21세기의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오늘도 그는 여전히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보통사람들’을 위한 설교(?)
소년시절부터 육십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복음전도의 꿈을 키워온 정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기 위해서 평자는 위에서 인용한 정 목사의 간증서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외에 <하나님의 사람>(이하 ‘하나님’)과 요한복음 강해 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하 ‘자녀’), 요한복음 강해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하 ‘자유’), 그리고 수영로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 목사의 설교문(2005년 10월30일-2006년 5월7일)을 꼼꼼히 읽었으며, 동영상도 필요에 따라서 시청했고, 몇몇 잡지에 실린 정 목사의 대담과 짧은글들도 참조했다.
우선 홈페이지에 올라온 주일공동예배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당 은혜홀을 가득채운 신자들이 감격적으로 예배드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평자는 아직 그렇게 큰 예배에 참석해본 적이 없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대형 프로젝터가 강단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매머드 교회당에서 그렇게 많은 청중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며, 한마음으로 기도드리고,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로 교회는 작년부터 5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교역자로는 당회장인 정 목사를 비롯해서 41명의 부목사, 5명의 강도사, 15명의 전도사, 8명의 교육전도사가 사역하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만 몇 천 명씩 모인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크기를 자랑하는 교회이다.
예배 분위기에 압도당한 평자는 정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전반적인 예배 분위기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설교는 청중들을 사로잡을만한 세련미는 둘째 치고 지나치게 평범하게 보여서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발음도 경우에 따라서 어눌하고, 설교하는 태도도 역시 초보자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평자의 마음을 끌어들일만한 게 거의 없었다. “말씀중심의 교회”를 가장 중요한 목회철학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설교가 목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80%에 이른다고 강조하는(그말씀 2005년11월호) 정 목사의 설교가 왜 이렇게 평범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동진 선교학연구소장은 이 대목을 평자의 생각과는 다른 뉘앙스로 이렇게 해명했다. “그의 설교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설교였다. 그는 항상 단순하고 가장 무식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했다. 어려운 용어나 지식의 말을 결코 쓰지 않았다.”(월간목회 2006년 5월) 어쩌면 그의 평가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알아듣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실제로 구름떼처럼 많은 청중들이 매주일 정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몰려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설교에 무언가 청중을 끄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 평자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행사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설교가 ‘별로’로 보인다는 이 해괴한 상황에 빠져버리고 만 셈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오늘 설교비평의 숙제다.
우선 평자는 독자들에게 정 목사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적절한 한 편의 설교를 소개하겠다. “선택과 기회”라는 제목의 설교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갈 5:13-15)는 바울의 편지를 본문으로 한다.(하나님 78-92) 정 목사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설화를 인용하면서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말로 이 설교의 문을 열었다. 사실 이 본문은 선택의 중요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할례주의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한 설교자는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율법의 진수인 할례와의 관계를 통해서 참된 자유의 본질을 설명해나가야 하는데 이 설교는 출발부터 성서 텍스트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정 목사는 선택의 중요성을 언급한 다음에 잘못된 선택이 큰 불행을 부른다는 주제로 넘어간다. 물론 이런 주제도 오늘의 본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불행을 당한 성서의 예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첫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를 택하는 대신 원망을, 찬양하는 대신 불평을, 순종하는 대신 불순종” 선택했으며, 결국 그들은 “불행하게” 되었다. 둘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판단을 잘못하고 선택을 잘못해서” 결국 작고 약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셋째,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바알 신을 선택함으로써 큰 불행을 당했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소돔을 선택했기 때문에 불행한 민족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 다섯째, 어리석은 부자도 재물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평자는 지금 정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하려는 건지 종잡기가 힘들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선택의 예를 들기 시작하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을 그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정 목사의 설교는 이제 두 번째 큰 주제로 넘어간다. 선택을 잘 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다섯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모세, 나아만. 정 목사는 성서가 영웅들의 선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내용들은 성서 텍스트의 변죽을 울리는 것이었지만, 어쨌든지 잘못된 선택과 잘된 선택을 구분했다면 그것만으로 설교는 끝날 수 있으며, 당연히 끝나야만 했다. 여기서 신자들은 이미 선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목사는 그 순간에 또 다시 “믿음으로 선택하면 축복받고 성공한다.”는 주제로 달려간다. 좋은 선택을 한 믿음의 사람들을 설명할 때 이미 제시된 그 내용을 그는 또 하나의 주제로 삼았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받고 성공합니다.” 하고 주장하더니 우리가 선택할 때 성령과 악령이 영향을 준다는 주제를 다시 끌어들인다. 선택의 중요성을 앞에서 언급한 마당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마당에 또 다시 성령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의 설교가 얼마나 산만하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은 선택을 위한 3가지 방법”이 다시 제시된다. 그야말로 이 설교 구조는 옥상옥이다. 세 가지 방법이 무엇인지는 웬만큼 눈치가 있는 독자라면 이미 짐작이 갈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는 게 그 방법이다. 이 설교는 여기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는다. 선택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모든 기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로 삼는 사람과 모든 기회를 사랑을 베풀 기회로 삼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설교의 마무리는 이렇다. “선택을 잘하면, 좋은 날이 찾아옵니다. 행복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생 선택 잘하시기를 바랍니다.”(하나님 92)
평자에게 인내심이 부족한 탓인지 영성이 매마른 탓인지, 그의 설교를 읽거나 들으면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다. “중언부언”(마 6:7)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내용적으로 동어반복에 불과한 설교를 듣고 어떻게 영적인 평화와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산만한 설교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는 이 현상이 평자에게는 놀라울 뿐이다.
성서 텍스트의 파괴
혹시 독자들 중에서 평자가 정 목사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일부만을 침소봉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설교가 위에서 인용한 설교와 비슷한 패턴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게 아니다. 이제 우리의 궁금증은 그의 설교가 그렇게 산만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예로 든 설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정 목사가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는 성서 텍스트에 놓여 있는 ‘삶의 자리’를 파괴한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이런 문제는 평자가 다른 글에서도 몇 번에 걸쳐 강조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 목사가 2006년 3월19일 주일에 전한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구약 시편 67:1-5절을 본문으로 한다. 시편 67편이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제 찬송이라는 사실은 6절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 목사는 5절까지만 본문으로 삼았으며, 결과적으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와는 전혀 다른 설교를 했다. 시편 기자는 추수감사제를 맞아 근동의 종교처럼 자연숭배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찬양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이런 본문을 읽는 설교자는 당연히 척박한 생활 조건 가운데서도 생존을 보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고대 이스라엘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충분하게 풀어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대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성서 텍스트의 근본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이 텍스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니 찾는다기보다는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한 자기의 주관적 상식만을 전하려고 애를 썼을 뿐이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정도로 사용하고 자기의 학문이나 철학, 사상을 전달하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분이(자유 16) 스스로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물론 먼 길을 돌아간다면 이 본문으로 그런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의 성서 텍스트 적용은 전형적인 아전인수이다. 정 목사가 이 본문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천천히 따라가자.
정 목사는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열거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의미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물론 몇몇 예화를 들면서, 그것도 문맥에 맞지 않는 예화를 끌어들이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1.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2. 전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삽니다. 3.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일보다 영원한 그 나라를 항상 생각합니다. 4. 핑계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삽니다. 정 목사는 일반적으로 틀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추수감사 찬양이라는 시편 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설교를 했다. 이런 설교는 분명히 성서 텍스트를 살리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래도 청중들이 은혜만 받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말하지는 말자. 이러한 은혜 만능주의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영혼을 속병 들게 할 것이다.
한편의 설교만 더 확인하자. 2006년 1월1일 주일에 행한 설교 “예수님만 오시면”은 이사야 61:1-3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본문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신다는 이사야의 메시아론적 신앙고백이다. 정 목사는 예수님이 곧 인생의 마스터키와 같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모시면 죄인이 의인으로, 저주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으로, 절망의 사람이 소망의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꼭 필요한 사람으로, 슬픔의 사람이 기쁨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정 목사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2천 년 전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 세상은 그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설교자는 성서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놓인 긴장과 틈을 뚫고 들어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메시아인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성서의 메시지를 호도하고 있다.
위의 설교에서 그는 예수를 모시기만 하면 일어나게 될 아홉 가지 일들을 일일이 거론했다. 1)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2) 승리의 복을 받습니다. 3) 평안의 복을 받습니다. 4) 모든 저주를 속량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됩니다. 5) 치료의 복을 받게 됩니다. 6) 생명이 있습니다. 7) 존귀한 자가 됩니다. 8) 평강이 있습니다. 9)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있습니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 들이기만 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참 행복자가 됩니다. 올 한 해 주님을 모시고 사셔서 성공하시고 행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용했던(눅 4:17 이하) 이사야 예언자의 이 본문을 일종의 행복예찬론으로 풀어내는 정 목사의 기발한 착상 앞에서 우리는 유구무언이다. 그는 이사야가 메시아적 희망을 품고 예언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포로 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되며, 또한 우리가 그들의 삶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본문을 선택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정 목사는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다. 정 목사의 깊은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설교에 나타난 현상만 본다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다만 형식적으로 그리스도교 예배와 설교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성서 텍스트를 선택할 뿐이다. 일종의 구색 맞추기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포장되어 있기만 하면 성서 텍스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오히려 파괴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오늘의 이 교회 현실이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다.
설교의 매너리즘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문제, 즉 설교의 산만성과 성서 텍스트의 파괴 이외에 그의 설교에는 복음적인 설교로서 위험한 크고 작은 요소가 적지 않다. 예컨대 선정적인 표현이 그중의 하나이다. 지면 관계로 맥락을 무시하고 몇 대목만 인용해보겠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은 ‘제가 일등으로 일억 바치게 해주세요.’ 어떤 사람은 ‘십등 안으로 헌금을 바치게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하나님 161)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수지맞습니다.”(하나님 215) “저도 십의 오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감동 안하시겠습니까?”(하나님 220)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입니다.”(하나님 268)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하나님 333)
이러한 선정적인 표현은 설교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정 목사가 인용하는 예화 내용의 선정성은 심각하다. 예컨대 2005년 11월13일 설교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벧전 2:1-3)에서 정 목사는 14년 동안 절의 총무로 활동하던 승려가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성서를 70번 정독한 뒤에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예화를 들었다. 그의 결론은 “이처럼 스님도 성경을 읽으면 은혜를 받습니다.”였다. 11월20일 설교에서는 청교도들이 북미대륙에 건너간 첫해에 드린 추수감사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셨기 때문에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는 예를 들었다. 이런 역사 이해가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얼굴값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정 목사는 아래와 같이 ‘화류계 여인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화류계 여인들 중에 못생긴 여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년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하나님 135)
지금 정 목사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는 중인지 평자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 자리에 정 목사의 표현대로 화류계에 종사하는 분이 앉아있었다면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성도의 얼굴”이라는 이 설교는 정 목사의 개인적인 관상학이지 설교라 할 수 없다.
이왕에 예화 문제가 나왔으니까 선정성만이 아니라 상투성에서도 크게 문제라는 점을 한번 짚어야겠다. 정 목사는 무슨 설교를 하든지 아브라함, 이삭, 요셉, 모세 같은 성서 인물들을 자주 인용한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현상인데, 설교의 본문인 성서 텍스트가 담고 있는 영적인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의 지평을 열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형식을 청중들에게 주입하기 위해서 신구약성서를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설교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또한 정 목사가 예로 드는 세속 인물들이 대개 록펠러, 크롬웰, 워싱턴,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수많은 재벌과 위인이라는 것은 그의 예화 적용이 상투적이라는 의미이다. 위인들 이외에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예화도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고 죽을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던 부인이 모든 걸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겼더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하나님 175) 군대에서 예수를 믿게 된 무당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가 어머니의 굿을 보고 주기도문을 외우자 굿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자녀 171) 본인으로서는 이런 예화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재탕, 삼탕으로 약발이 다 떨어진 찌꺼기와 같다. 이런 상투적인 예화들이 교회 강단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되면 결국 설교의 천박성은 피할 길이 없다. 이런 방식이 바로 보통사람들을 위한 설교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선정적이고 상투적인 정 목사의 예화 사용이 최근에 들어서 훨씬 그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과 2001년에 출판된 설교집에 비해 홈페이지 올라온 최근의 설교에는 훨씬 많은 예화가 남발되고 있었다. 그에게서 설교의 연조와 예화의 의존도가 정비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약 좋다 남용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2006년 2월12일의 설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고후 12:7-10)에 실린 예화를 간추려보자. 1) 원래 구두 수선공이었던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 이야기. 2) 건축 중인 교회를 둘러보다가 머리를 다쳐서 앓다가 죽은 사람. 3) 축구경기를 하다가 쓰러져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앓다가 죽은 어느 목사 이야기. 4)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의 자서전 이야기. 5) 소아마비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야기. 6) 미군 군인과 결혼한 한국 여자 이야기 7)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경구. 그 이외에도 성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2006년 3월19일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시편 67:1-5)에 다음과 같은 예화들이 등장한다. 1) 지나던 길에 얻은 전도지로 예수를 믿게 된 중국 청년 마징링 이야기. 2) 수족관에 일하는 청년의 간증. 3) 무디의 경구. 4)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선교하던 몰간 목사의 이야기. 이 설교에도 역시 그 이외에 수많은 성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편의 설교만 더 확인하자. 2006년 4월2일의 설교 “삶의 목적”(고전 10:31-33)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담고 있다. 1) 알로피셔(alopecia)라는 탈모증에 걸렸던 록펠러 이야기. 2) CCC 창립자인 빌 브라이트. 3) 일제시대에 황해도에 살면서 십일조를 잘했던 이찬영 장로. 4)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팔다가 망해버린 프레몽트르 수도원. 5) 새로 부임하여 7백명의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만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고백하는 젊은 목사 이야기. 이런 정도면 정 목사의 설교는 설교인지 예화모음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수영로교회에 전문적으로 예화를 수집하는 부 목사가 활동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예화가 시와 때도 없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서 텍스트의 비중이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은 그의 설교가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는 증거이다.
설교의 폭력성
정 목사의 설교가 산만하건 말건, 성서 텍스트를 파괴하건 말건, 예화의 과잉으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져있건 말건 상관없이 수영로교회는 한국의 어느 교회도 쉽게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교회성장은 목사의 설교와 상관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정 목사는 이런 설교의 한계를 넘어설만한 목회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런 현상을 종합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은 설교비평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내막을 뚫어볼만한 영적인 통찰력이 평자에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도에서 대충 글쓰기를 끝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요소들을 합한 것보다 훨씬 불량하게 보이는 문제점만은 마저 짚어야겠다. 이 문제점은 비단 정 목사만이 아니라 한국의 여러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며, 또한 어떤 점에서는 위의 궁금증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이렇게 마지막 자리로 미뤄졌다. 이제 어린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과자의 유해성을 밝혀낸다는 자세로, 숨을 고르면서 이 글쓰기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어보자.
평자의 생각에 한국교회에서 활동하는 대중적인 설교자들의 설교는, 모든 이들의 설교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공격적이며, 따라서 폭력적이다. 그런데 설교의 폭력성과 대중성 사이에는 모종의 은밀한 거래가 형성된다. 대중적 설교자들의 넘치는 자신감은 종교적 폭력성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심리적 약점에 토대하고 있으며, 설교자들을 향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그런 폭력성에 기대서 얻을 수 있는 종교적 대리만족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거래가 강화되면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비합리적 열광주의의 포로가 되고 만다. (설교의 공격성에 관해서는 장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졸고 “허무주의 영성”을 참조할 것. 기상 2005년2월)
그런데 목회와 설교의 폭력성은 대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설교자나 청중들이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랑을 입에 달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인류 역사에 행사한 폭력성을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벌인 큰 전쟁은 접어두고라도, 또한 우상타파라는 명분으로 벌인 마녀사냥은 접어두고라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일컬어진 청교도들의 배타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태도에 깃든 반생명적 요소도 역시 폭력이다. 주변의 중소형 교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십 대의 교회 버스를 운용하거나 대형 이벤트를 벌이면서 무조건적인 성장 프로그램을 밀어붙이는 대형교회의 행태도 역시 은폐된 폭력이다. 아니 그것은 노골적인 폭력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두는 게 좋겠다. 진화론자들과 동성애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사형폐지론자들과 자신들의 평화 지향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군 대체 복무를 요구하는 소종파 종교인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겨누면서, 경제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신자유주의와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가장 폭력적인 기질을 보이고 있는 미국을 향해서는 옹호 내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앞에서 평자의 이런 문제제기는 공연히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안타깝지만 정 목사의 설교도 이런 폭력적인 요소를 적지 않게 안고 있다. 평자의 이런 주장이 어떤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정 목사는 기본적으로 설교자의 은혜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에 관한 한 대담에서 “설교는 받은 은혜와 삶의 체험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은혜를 받아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과 상관없고 자신에게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설교는 죽은 것입니다.”고 밝힌 적이 있다.(그말씀, 2005년 11월호에서) 그가 강조하는 은혜와 평자가 지적하는 폭력성은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정 목사는 기본적으로 신자들을 착하다고 보는 인격적인 목회자이며 설교자이다. 직접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정 목사와 수영로 교회 신자들 사이에는 깊은 인격적, 신앙적 신뢰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뢰감이 수영로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의 하나로 작용하지 않을는지. 그런 마당에 평자가 정 목사의 설교를 폭력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평자에게 사리 판단력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어떤 비틀린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오해를 받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평자가 보기에 정 목사의 설교에 내재된 가장 결정적인 폭력성의 뿌리는 정 목사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 있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다보면 주님이 제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체험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습니다.(하나님 274)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도하고, 주님의 위로를 받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바른 삶의 태도이다. 그러나 정 목사가 주장하는 체험은 그런 일반적인 신앙의 태도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경지가 탁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와 관련된 그의 주장을 천천히 추적해 보자.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깊은 신앙을 체험한 그는 강도사 시험을 앞두고 비를 맞으며 바위 위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을 때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무릎 59) 이런 체험은 그의 목회 전반을 지배한다. 주일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뒷자리가 빈 걸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뒷자리가 비었네요. 빨리 심방하셔야겠어요. ... 제발 심방 좀 해 주세요.” 대표기도가 끝나자 곧 교인들이 몰려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그 장면에서 다시 기도했다. “주님, 수고하셨습니다.”(무릎 154) 그는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때마다 주님께 심방을 가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런 특별 기도를 한 다음에 어떤 신자는 정 목사를 찾아와 이렇게 간증한 적도 있다. “목사님, 그동안 교회에 못 나와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목사님이 나타나셨더라고요. 안 나올 수가 없어서 이렇게 교회 다시 나왔습니다.”(무릎 155)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는 이런 “기도와 응답”에 관한 간증으로 일관된다. 정 목사는 목회의 모든 문제를 주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그 응답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수영 로터리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이다. 교회 주차장이 부족해서 주일마다 간선도로에 세워둔 교인들의 차가 견인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정 목사는 이런 일로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강단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님, 주차장을 주세요. 주차장을 주세요.” 그날 밤 꿈속에서 주님은 “주차장을 주겠노라”고 응답하셨다. 그는 교인들에게 주님의 약속을 선포했다. “저 땅을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저 땅을 우리 교회가 매입하길 원하십니까? 원하시면 두 손 들어 ‘할렐루야’ 하십시오.”(무릎 61) 계약금만 내고 중도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 목사는 금식기도를 했으며, 주일 새벽에 주님이 이사야 45:2,3절 말씀으로 응답하셨다고 한다. 그 순간에 정 목사는 기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다 됐네요! 다 됐네요! 다 됐네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 주일 설교에서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간증했고, 다음날 교회 계좌로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2006년 5월7일, 어린이 주일 설교에서도 그는 1991년도에 있던 일을 전했다. 정 목사 가족들이 미국에서 생활한 다음에 세 남매를 그곳에 남겨두고 부부만 수영로 교회로 돌아오게 될 때의 이야기다. 자기들끼리만 남게 될 아이들이 걱정되어 악몽을 꾸기까지 한 정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청교도를 타락시킨 마귀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진을 치고 있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정 목사는 다음날 아침 세 남매에게 이런 주님의 음성을 전했다고 한다.
정 목사는 이러한 자신의 체험에 관한 주변의 우려 섞인 소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같은 교단의 목사님들이 정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소리로 들립니까? 소리가 납니까?” 하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정 목사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들어 보셔야 알죠.” 하고 대답한다.(무릎 134) 과연 그에게 일어나는 이런 경험의 실체는 무엇인가? 주님의 음성이 아람어로 들리는가? 한국어로 들리는가? 평자가 알기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은 대개 비현실적인,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나 아니면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잠정성
설교는 물론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주님의 뜻을 청중들에게 선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주님의 응답을 말하거나, 또는 문학적인 수사의 차원에서 주님의 음성 운운하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 목사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목회의 문제를 주님의 음성과 연결시킨다는 건 위험하다. 생각해보라. 교회의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서 목사의 생각을 반대하고 있는 신자들을 향해서 목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노라 하면, 그 공동체의 질서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만약 목사가 주차장이든, 복지관이든, 교회묘지이든 그런 것을 구입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면 신자들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해결해나가면 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주님의 응답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고 설교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평자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모르는 어리석음이거나 아니면 목회의 효율성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다.
이런 어리석음과 거짓말이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횡행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포함한 인간 역사의 잠정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데에 기인한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과 결단은 그것이 아무리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진정성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잠정성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판단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종말이 이르러야 확정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의 진리성은 유보된다. 이런 사실은 그렇게 오묘한 현학(玄學)을 통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날 주님의 뜻으로 확신했던 행위들이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역사적 실증들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도그마도 역시 이런 잠정성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말인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운명이, 곧 그의 부활이 종말에 일어나게 될 궁극적 생명 사건의 선취(先取)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성취(成就)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선취와 성취 사이의 현실인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성서 텍스트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적 전통과, 그리고 삶의 리얼리티를 읽을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해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부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의존적인 태도로, 즉 두려움과 떨림의 영성으로 말이다. 이것이 곧 자신의 신앙적 행위까지 상대적인 지평에 놓고 대신 하나님의 행위만을 절대적인 지평에 놓는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선포한다는 것은, 그래서 신자들이 그 설교자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게 유도한다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형성된 종교적 아우라(aura)는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발견되듯이 대중들의 영혼에 폭력적으로 행사될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런 폭력성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목회와 설교 현장은 “벌거벗은 임금” 우화와 닮아있다. 설교자와 평신도 지도자와 일반 신자들, 그리고 신학교수들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또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일조할 수도 있다. 누가 이 사태를 직시하고 외칠 것인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지금도 자신의 신앙경험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만을 드러내는 설교에 온 영혼을 불사르고 있을 믿음의 동지들에게 평자의 이야기가 우울한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서곡으로 들려지기를 바라면서, 이미 오래 전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하고 한국교회를 향해 세레나데를 불렀던 한 인문학자의 고언을 이 설교비평의 갈무리로 삼겠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 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간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뜩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 김영민, 한겨레21, 1999.4.15.>
(기독교사상, 2006년 6월호)
2006.05.28 06:27:24
내일 전할 말씀을 붙들고 있다가 마침 따끈 따근하게 갓 구어내 올린 목사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내 설교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곁가지로 한 채 나의 말과 생각이 더 들어 있지나 않은지...
더군다나 잘못된 생각들이...
정말 설교자들이 매번 확인하고, 다짐해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내 설교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곁가지로 한 채 나의 말과 생각이 더 들어 있지나 않은지...
더군다나 잘못된 생각들이...
정말 설교자들이 매번 확인하고, 다짐해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2006.05.28 14:18:29
성서 텍스트의 파괴, 극단적 매너리즘으로 일관된 공격적, 폭력적 설교는, 정목사님의 평글에서도 언급하신 것 처럼, 대형교회 설교자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왕적 목회자'를 꿈꾸며, 그게 성공하는 목회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를 꿈꾸는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설교를, 목회 스타일을 배우려고하고 닮아가기를 희망합니다. 폭력이 또다른 폭력을 양산하겠죠..
2006.05.28 18:18:20
뜰 앞에 가득 담긴 햇살 같이
산위 작은 개울물의 졸졸거리는 소리와 같이
무거운 바위 치우고 ...
곰팡이 냄새 나는 옷들을 따사로운 봄 햋빛에 말리는 것 같이.
멘델스죤의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음악을 듣는 것 같이...^^
교수님! 박휘자입니다.
교수님의 설교비평을 읽고 마치 사랑을 경험하지도 못한 사춘기 소녀의 가슴 뜀과도 같은
방황하던 영혼이 지쳐 있던 중 우연히 가까이에 있는 보화를 발견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민영진 박사님의 평에도 있듯이 교수님의 설교평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캄의 말처럼 교수님의 매스가 너무 날카롭기 때문에 치유를 바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원론의 테두리와 대형교회의 높은 벽 밑에서
그리고 본회퍼의 세속화가 아닌 값싼 감상적 은혜주의에서
허공을 맴돌고 ......
교수님의 설교 비평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를 외치며 아브라함의 3일 길을 걸어간 키에르 케고르
십자가 앞에서 동지를 구하는 것은 오히려 패역한 일이라며 홀로 외로운 길을 고독과 함께 걸어간 그의 길이
생각납니다.
누군가는 가야할 길이지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쉽게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감히 많은 부끄러움과 뻔뻔스러움을 가지고 교수님께 이 길을 가 주십사 하고 부탁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 힘들고 지쳐하는 영혼들,
한국 교회를 바라보고 안타까와하는 지성인들의 바람이자
한국교회의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이 시대를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물로 더욱 날카로운 메스를 갈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산위 작은 개울물의 졸졸거리는 소리와 같이
무거운 바위 치우고 ...
곰팡이 냄새 나는 옷들을 따사로운 봄 햋빛에 말리는 것 같이.
멘델스죤의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음악을 듣는 것 같이...^^
교수님! 박휘자입니다.
교수님의 설교비평을 읽고 마치 사랑을 경험하지도 못한 사춘기 소녀의 가슴 뜀과도 같은
방황하던 영혼이 지쳐 있던 중 우연히 가까이에 있는 보화를 발견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민영진 박사님의 평에도 있듯이 교수님의 설교평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캄의 말처럼 교수님의 매스가 너무 날카롭기 때문에 치유를 바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원론의 테두리와 대형교회의 높은 벽 밑에서
그리고 본회퍼의 세속화가 아닌 값싼 감상적 은혜주의에서
허공을 맴돌고 ......
교수님의 설교 비평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를 외치며 아브라함의 3일 길을 걸어간 키에르 케고르
십자가 앞에서 동지를 구하는 것은 오히려 패역한 일이라며 홀로 외로운 길을 고독과 함께 걸어간 그의 길이
생각납니다.
누군가는 가야할 길이지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쉽게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감히 많은 부끄러움과 뻔뻔스러움을 가지고 교수님께 이 길을 가 주십사 하고 부탁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 힘들고 지쳐하는 영혼들,
한국 교회를 바라보고 안타까와하는 지성인들의 바람이자
한국교회의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이 시대를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물로 더욱 날카로운 메스를 갈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2006.05.29 00:02:09
위의 코멘트를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정확하게 본 것도 있고,
미처 못본 부분도 있고,
또 잘못 부분도 뒤섞여 있겠지요.
어느 누가 진리의 영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것이나마 정직하게 풀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라기는 저와 비슷한 관점에서
한국교회와 설교에 대해서 고민하는 분들에게
사유의 길라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는군요.
다른 곳에서는 다르게 보이겠지만요.
박휘자 선생,
처음 글을 올리셨군요.
반갑습니다.
갈고 있는 영성의 밭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정확하게 본 것도 있고,
미처 못본 부분도 있고,
또 잘못 부분도 뒤섞여 있겠지요.
어느 누가 진리의 영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것이나마 정직하게 풀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라기는 저와 비슷한 관점에서
한국교회와 설교에 대해서 고민하는 분들에게
사유의 길라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는군요.
다른 곳에서는 다르게 보이겠지만요.
박휘자 선생,
처음 글을 올리셨군요.
반갑습니다.
갈고 있는 영성의 밭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2006.05.29 10:38:31
원인도 병명도 모르고 앓아오던 오랜병이 명의를 만난듯합니다.
수영로교회를 얼마간 다녀본 적이 있고,
친구 남편이 부목으로 일한 교회라 특별히 꼼꼼히 읽었습니다.
명확하고 성실한 비평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감정적으로 속고 속이는 현상은 저 또한 자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이 목사님 덕분에 조금씩 예민해지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습니다.
벌거벗고 다니는 임금님이나 그걸 보는 사람들 모두가 부끄러운 일인것을...
누군가 나서서 외쳐야 할 한 사람을
기다리기만하는 이 묘한 분위기가 참 오래갑니다.
간혹 궁금할때가 있는데요 목사님
지금까지 설교비평한 목사님 본인이나 교회 이름으로 어떤 해명이나 항의같은건 없었나요?
아무말 없는게 어찌보면 더 이상한 일이기도 한데 말이죠.
'설교비평'을 책자로 받아 볼 날이 언제쯤일지 기다려 집니다.
수영로교회를 얼마간 다녀본 적이 있고,
친구 남편이 부목으로 일한 교회라 특별히 꼼꼼히 읽었습니다.
명확하고 성실한 비평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감정적으로 속고 속이는 현상은 저 또한 자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이 목사님 덕분에 조금씩 예민해지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습니다.
벌거벗고 다니는 임금님이나 그걸 보는 사람들 모두가 부끄러운 일인것을...
누군가 나서서 외쳐야 할 한 사람을
기다리기만하는 이 묘한 분위기가 참 오래갑니다.
간혹 궁금할때가 있는데요 목사님
지금까지 설교비평한 목사님 본인이나 교회 이름으로 어떤 해명이나 항의같은건 없었나요?
아무말 없는게 어찌보면 더 이상한 일이기도 한데 말이죠.
'설교비평'을 책자로 받아 볼 날이 언제쯤일지 기다려 집니다.
2006.05.29 15:00:29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랜 만에 인사 드립니다.
그래도 꼬박 꼬박 귀한 글들을 잘 읽고 있었어요.
오늘 설교 비평을 잘 이해하기 위해 저도
수영로 교회에서 설교를 좀 들어 봤습니다.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생기는지 궁금해 졌습니다.
어쩌면 모로가도 서울만가면 그만이듯이
어떤 예수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는
방정식에서 나온 배포가 아닐런지요
그리고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을 믿고 의지하고 싶어하는
민중들(바로 그 보통 사람들)의 종교적 본능이 이 모든 퍼포먼스의 근본같습니다.
그래서 탈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교주적 권위에 그토록 복종하고
그로인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불가침적 영역안에 목사의 아우라가 세워지며 보호되고
이러한 악순환으로 그들만의 동화적 유희의 마당이 견고하게 구축되어가는 것 같아요
목사님..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적 바알종교를 과연 생명의 공동체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요?
(혹시 이런 언급까지는 금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랜 만에 인사 드립니다.
그래도 꼬박 꼬박 귀한 글들을 잘 읽고 있었어요.
오늘 설교 비평을 잘 이해하기 위해 저도
수영로 교회에서 설교를 좀 들어 봤습니다.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생기는지 궁금해 졌습니다.
어쩌면 모로가도 서울만가면 그만이듯이
어떤 예수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는
방정식에서 나온 배포가 아닐런지요
그리고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을 믿고 의지하고 싶어하는
민중들(바로 그 보통 사람들)의 종교적 본능이 이 모든 퍼포먼스의 근본같습니다.
그래서 탈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교주적 권위에 그토록 복종하고
그로인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불가침적 영역안에 목사의 아우라가 세워지며 보호되고
이러한 악순환으로 그들만의 동화적 유희의 마당이 견고하게 구축되어가는 것 같아요
목사님..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적 바알종교를 과연 생명의 공동체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요?
(혹시 이런 언급까지는 금기일지도 모르겠네요)
2006.05.29 23:49:28
namoo 님,
아직 해명, 항의, 반박, 논박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내 글을 모순을 지적해 줘야 정신 번쩍 들텐데,
그게 없으니 심심하군요.
이러다가 언젠가 큰 코 닥칠 때가 오겠지요.
책은 약간의 사정 때문에 늦어졌는데,
곧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제 비평글을 보고 명의 운운하시니 조금 민망하군요.
어쨌든지 관점이 비슷하다는 걸로 알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진영 님,
오랜 만이군요.
우리가 볼 때 정말 이상한 공동체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는 걸까, 하고
저도 궁금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건 우리가 소위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쪽까지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어느 누구도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없다는 걸 전제한다면
제삼자가 나서서 너는 아니야 하고 말하는 건 경솔한 것 같습니다.
일단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향해서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라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즉 바람처럼 자의적으로 활동하는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비평을 하는 이유는
어떤 집단을 교리적으로 재단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굳어진 분들에게는 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기두 한데,
주로 젊은 설교자들과 신학생들,
아직 굳어지지 않는 사유의 능력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작은 길을 제시하려는 것 뿐입니다.
(금기 운운...) 이런 걱정은 하지 말고,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다비아가 은연 중에 글쓰는 분들에게 자기검열을 강요하고 있나요?
아직 해명, 항의, 반박, 논박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내 글을 모순을 지적해 줘야 정신 번쩍 들텐데,
그게 없으니 심심하군요.
이러다가 언젠가 큰 코 닥칠 때가 오겠지요.
책은 약간의 사정 때문에 늦어졌는데,
곧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제 비평글을 보고 명의 운운하시니 조금 민망하군요.
어쨌든지 관점이 비슷하다는 걸로 알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진영 님,
오랜 만이군요.
우리가 볼 때 정말 이상한 공동체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는 걸까, 하고
저도 궁금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건 우리가 소위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쪽까지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어느 누구도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없다는 걸 전제한다면
제삼자가 나서서 너는 아니야 하고 말하는 건 경솔한 것 같습니다.
일단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향해서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라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즉 바람처럼 자의적으로 활동하는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비평을 하는 이유는
어떤 집단을 교리적으로 재단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굳어진 분들에게는 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기두 한데,
주로 젊은 설교자들과 신학생들,
아직 굳어지지 않는 사유의 능력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작은 길을 제시하려는 것 뿐입니다.
(금기 운운...) 이런 걱정은 하지 말고,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다비아가 은연 중에 글쓰는 분들에게 자기검열을 강요하고 있나요?
2006.05.30 09:55:40
목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주님의 음성과 관련해서는
목사님의 견해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본 자요, 먹어본 증인이라고
담대히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도상에서 빛을 본 사도바울더러 미쳤다고 했지만
사도바울은 미친게 아니라 제 정신이라고 반박한 입장과 비슷합니다.
어느 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만인제사장은 누구나 베드로나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기때문입니다.
영적 시야가 아닌 육적시야(지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으로 재단하시지만
그러나, 많은부분 정치하고 일리와 설득력이 있으며
때로는 영적 시야를 확보한 사람보다 더 정확하다는 점에서
목사님의 신학의 경지는 가히 놀랄만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저 개인의 견해이니까..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반대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안된다고 하시면..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직접 먹어보지 못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신 적이 없으시면서
함부로 속단하시는지...ㅠㅜ 예전부터 저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혹 노여워하실까 염려됩니다..... ㅠㅜ 저의 다름을 그냥 다름으로 받아주소서)
그리고 제가 반박하게 될 글은
위에서 꼬리글을 쓰신 분들과는 대립될 수도 있는 의견입니다.
제 견해를 밝힐 경우..사실이지 정목사님의 글에 매료된
다비아 회원들의 폭언?이나 폭력이 두렵기도 합니다.
듣기 좋은 말은 쉽게 할 수 있었지만, 반대가 말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면... 감히... 목사님의 이 비평글에 대한 비평을
조목 조목 비평?해서 올리고 싶은데... 망설여지는군요.
주님의 음성과 관련해서는
목사님의 견해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본 자요, 먹어본 증인이라고
담대히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도상에서 빛을 본 사도바울더러 미쳤다고 했지만
사도바울은 미친게 아니라 제 정신이라고 반박한 입장과 비슷합니다.
어느 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만인제사장은 누구나 베드로나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기때문입니다.
영적 시야가 아닌 육적시야(지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으로 재단하시지만
그러나, 많은부분 정치하고 일리와 설득력이 있으며
때로는 영적 시야를 확보한 사람보다 더 정확하다는 점에서
목사님의 신학의 경지는 가히 놀랄만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저 개인의 견해이니까..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반대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안된다고 하시면..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직접 먹어보지 못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신 적이 없으시면서
함부로 속단하시는지...ㅠㅜ 예전부터 저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혹 노여워하실까 염려됩니다..... ㅠㅜ 저의 다름을 그냥 다름으로 받아주소서)
그리고 제가 반박하게 될 글은
위에서 꼬리글을 쓰신 분들과는 대립될 수도 있는 의견입니다.
제 견해를 밝힐 경우..사실이지 정목사님의 글에 매료된
다비아 회원들의 폭언?이나 폭력이 두렵기도 합니다.
듣기 좋은 말은 쉽게 할 수 있었지만, 반대가 말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면... 감히... 목사님의 이 비평글에 대한 비평을
조목 조목 비평?해서 올리고 싶은데... 망설여지는군요.
2006.05.30 09:46:38
정목사님의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비평 잘 읽었습니다.
서울사라 부산내려와 해운대에 살면서 저도 수영로교회에 등록하고
근 8년정도 신앙생활하였습니다. 성가대와 찬양인도로 봉사하며 지냈지만
수영로 교회에서 나오기 전까진 사실 설교듣고 신앙 생활하는게
고역에 가까왔습니다. 맨날 설교듣고 "저걸 설교라고..." 웅얼대면
집사람은 비판하지 말라며 의견충돌이 생기곤 했었죠..
지금은 수영로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개척교회에 다닙니다.
성도가 1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저희 목사님이 설교를 보통 한시간 정도 하시는데
예와와 간증은 결코 사용하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로가까이에 참 좋은 목자가 있음을 깨닳지 못한 것이지요^^
대형교회의 잘못된 가르침들은 실로 주님의 교회 세대에 독과 같은 것 이라 생각합니다.
수영로 교회 근처에 아무리 좋은 목회자들이 바른 말씀을 외쳐도
잘못된 목자들의 잘못된 말씀에 성도가 인이 박혀버리면 도체 성도들이
바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감히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해 한마디 토를 달자면^^(용서 하시겠죠)
설교비평 하실때에 성경을 조금더 인용하는 것이 좀더 강력한 힘을 발휘 할거라 봅니다.
오늘의 설교비평을 예를 들어보면 수영로 교회 정필도 목사님을 비롯한
오늘날의 설교자들의 설교의 폭력성과 그 폭력성을 당연히 여기고 추종하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더불어 성공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신 비평에 좀더 힘을 더하기
위하여 예레미아 선지자의 글을 인용 하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아 당대의 구약교회 시대 뿐만아니라 신약 교회시대인 지금도
우리 성도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 입니다.
=================================================
[ 렘 5:30 ~ 31 ]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를 얻지 못하여 이리비틀 저리비틀(아모스)하는 기갈의 세대에
하나님의 신으로 덧입고 우리 교회시대 목자와 백성들의 허물과 죄악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고발하는 소명의 길을 힘잃지 마시고 용기로 달려 가시길 기도 합니다..
서울사라 부산내려와 해운대에 살면서 저도 수영로교회에 등록하고
근 8년정도 신앙생활하였습니다. 성가대와 찬양인도로 봉사하며 지냈지만
수영로 교회에서 나오기 전까진 사실 설교듣고 신앙 생활하는게
고역에 가까왔습니다. 맨날 설교듣고 "저걸 설교라고..." 웅얼대면
집사람은 비판하지 말라며 의견충돌이 생기곤 했었죠..
지금은 수영로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개척교회에 다닙니다.
성도가 1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저희 목사님이 설교를 보통 한시간 정도 하시는데
예와와 간증은 결코 사용하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로가까이에 참 좋은 목자가 있음을 깨닳지 못한 것이지요^^
대형교회의 잘못된 가르침들은 실로 주님의 교회 세대에 독과 같은 것 이라 생각합니다.
수영로 교회 근처에 아무리 좋은 목회자들이 바른 말씀을 외쳐도
잘못된 목자들의 잘못된 말씀에 성도가 인이 박혀버리면 도체 성도들이
바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감히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해 한마디 토를 달자면^^(용서 하시겠죠)
설교비평 하실때에 성경을 조금더 인용하는 것이 좀더 강력한 힘을 발휘 할거라 봅니다.
오늘의 설교비평을 예를 들어보면 수영로 교회 정필도 목사님을 비롯한
오늘날의 설교자들의 설교의 폭력성과 그 폭력성을 당연히 여기고 추종하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더불어 성공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신 비평에 좀더 힘을 더하기
위하여 예레미아 선지자의 글을 인용 하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아 당대의 구약교회 시대 뿐만아니라 신약 교회시대인 지금도
우리 성도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 입니다.
=================================================
[ 렘 5:30 ~ 31 ]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를 얻지 못하여 이리비틀 저리비틀(아모스)하는 기갈의 세대에
하나님의 신으로 덧입고 우리 교회시대 목자와 백성들의 허물과 죄악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고발하는 소명의 길을 힘잃지 마시고 용기로 달려 가시길 기도 합니다..
2006.05.30 10:27:48
조현아님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몇자 적어 봅니다.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체험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필요할찌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체험이 영적인 권위로 탈바꿈하거나
성도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지팡이로 탈바꿈 해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이미 발하여 놓으셨습니다. 즉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형상을 보는 것 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사도바울의 태도를 보며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와 가르침들속에 자신이 예수님을 본 체험을을 강조하거나
내세우거나 자신의 신앙의 지팡이로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당대의 많은 거짓선생들은 환상을 보았다,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느니
헛된 영적체험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배울은 결코 자신의 영적체험으로
성도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세 바울은 말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린도 후서 1절로 5절)
바울은 부득불 자랑한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십사년 동안 성도들에게 자신의 엄청난 영적 체험을
입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왜 바울을 그리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리할 필요가 없었을뿐 아니라
그러한 자랑이 성도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입니다.
또 볼까요? 바울은 다른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천국을 보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마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말씀 하십니다.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치 아니한다"라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영적체험에 의지한 신앙을 경계하고 있는 구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시대의 목자들은 그런 말씀은 잘 가르치지 않고 있지요..
저희 목사님의 경우도 결코 영적인 체험이 있어도 단상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들어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아! 내가 귀신 보고 악한 음성들었구나"하고 무시해버리십니다.
수영로 교회에 같아 다녔던 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늘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신앙간증을 제게 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좋다고 성경공부하러 가자면
시간이 없다는 핑계대기 일 수 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발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면
성도를 의와 경건과 책망으로 좁은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 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체험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필요할찌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체험이 영적인 권위로 탈바꿈하거나
성도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지팡이로 탈바꿈 해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이미 발하여 놓으셨습니다. 즉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형상을 보는 것 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사도바울의 태도를 보며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와 가르침들속에 자신이 예수님을 본 체험을을 강조하거나
내세우거나 자신의 신앙의 지팡이로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당대의 많은 거짓선생들은 환상을 보았다,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느니
헛된 영적체험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배울은 결코 자신의 영적체험으로
성도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세 바울은 말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린도 후서 1절로 5절)
바울은 부득불 자랑한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십사년 동안 성도들에게 자신의 엄청난 영적 체험을
입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왜 바울을 그리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리할 필요가 없었을뿐 아니라
그러한 자랑이 성도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입니다.
또 볼까요? 바울은 다른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천국을 보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마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말씀 하십니다.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치 아니한다"라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영적체험에 의지한 신앙을 경계하고 있는 구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시대의 목자들은 그런 말씀은 잘 가르치지 않고 있지요..
저희 목사님의 경우도 결코 영적인 체험이 있어도 단상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들어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아! 내가 귀신 보고 악한 음성들었구나"하고 무시해버리십니다.
수영로 교회에 같아 다녔던 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늘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신앙간증을 제게 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좋다고 성경공부하러 가자면
시간이 없다는 핑계대기 일 수 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발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면
성도를 의와 경건과 책망으로 좁은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 입니다..
2006.05.30 21:09:20
유치함도 필요한 사람이 있겠지요. 유치한자, 심화된자, 강화된자,
모두가 자기 부족함을 메우기위해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 합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그렇지만 바른길을 제시 하고 지평을 열어 주어야 할것입니다.
목사님의 광야의 외침, 열정, 존경 합니다
모두가 자기 부족함을 메우기위해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 합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
그렇지만 바른길을 제시 하고 지평을 열어 주어야 할것입니다.
목사님의 광야의 외침, 열정, 존경 합니다
2006.05.30 12:25:22
코람데오님의 의견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가끔씩 어떤 영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 개인의 문제라든지 혹은 교회 전반에 관한 것이든지
누구말대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할만한 영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설교시에 한마디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또 기도회 시간에 거기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조금은 나를 달리 볼 것 같은 마음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그런 생각이 나를 교만으로 이끌어 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물리칩니다.
그저 꾹꾹 누르고 기도합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나 자신을 교만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혹시 나의 한마디가 성도들로 하여금 두걸음 세걸음 개인적인 음성, 체험을 지향하는 믿음으로 유도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혹 자랑스럽게 그럼 경험을 말해 오는 성도들에게는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일반화시킬 수 없는 주관적인 체험이니
그것도 좋지만 말씀을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적 체험은 인정하되 그것을 일반화 하면 문제가 있을 듯 합니다.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가끔씩 어떤 영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 개인의 문제라든지 혹은 교회 전반에 관한 것이든지
누구말대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할만한 영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설교시에 한마디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또 기도회 시간에 거기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조금은 나를 달리 볼 것 같은 마음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그런 생각이 나를 교만으로 이끌어 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물리칩니다.
그저 꾹꾹 누르고 기도합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나 자신을 교만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혹시 나의 한마디가 성도들로 하여금 두걸음 세걸음 개인적인 음성, 체험을 지향하는 믿음으로 유도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혹 자랑스럽게 그럼 경험을 말해 오는 성도들에게는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일반화시킬 수 없는 주관적인 체험이니
그것도 좋지만 말씀을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적 체험은 인정하되 그것을 일반화 하면 문제가 있을 듯 합니다.
2006.05.30 23:39:59
조현아 님,
제 설교비평에 대한 비평을 조목조목 제시하신다니
기대가 됩니다.
사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담론을 형성해야
사유의 변증법적인 발전이 가능하거든요.
언젠가는 내 글의 헛점을 뚫어내는 논객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지금은 깜빡했지만
높은뜻숭의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문제삼은 분이 있었습니다.
여기 다비아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구요,
어딘가 기독교 계통 포털 사이트에서 봤나,
희미하군요.
제 글을 비평할 분은 아마 이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쪽에 있는
신학자가 아닐까 하고 예측을 했는데,
아직 그런 일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조금 지루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이트의 소중한 손님이신
조현아 님이 나서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한 수고를 감당하겠다는 말이니까
당연히 감사한 일이지요.
다른 분들이 조현아 님의 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대글을 단다고 하더라도 게의치 마세요.
다비아 회원들의 폭언이나 폭력이 겁난다는 말은 취소하는 게 좋겠군요.
옛날에 그런 일이 한 두번 있었는지 모르지만(그것도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최근에는 없던데요.
조현아 님이 먼저 시비를 걸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런 건 해프닝이니까 접어두고
좌고우면 없이 보이는대로 비판글을 써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제 설교비평에 대한 비평을 조목조목 제시하신다니
기대가 됩니다.
사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담론을 형성해야
사유의 변증법적인 발전이 가능하거든요.
언젠가는 내 글의 헛점을 뚫어내는 논객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지금은 깜빡했지만
높은뜻숭의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문제삼은 분이 있었습니다.
여기 다비아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구요,
어딘가 기독교 계통 포털 사이트에서 봤나,
희미하군요.
제 글을 비평할 분은 아마 이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쪽에 있는
신학자가 아닐까 하고 예측을 했는데,
아직 그런 일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조금 지루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이트의 소중한 손님이신
조현아 님이 나서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한 수고를 감당하겠다는 말이니까
당연히 감사한 일이지요.
다른 분들이 조현아 님의 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대글을 단다고 하더라도 게의치 마세요.
다비아 회원들의 폭언이나 폭력이 겁난다는 말은 취소하는 게 좋겠군요.
옛날에 그런 일이 한 두번 있었는지 모르지만(그것도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최근에는 없던데요.
조현아 님이 먼저 시비를 걸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런 건 해프닝이니까 접어두고
좌고우면 없이 보이는대로 비판글을 써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2006.05.30 23:53:41
코람데오 님,
글쓰기의 접근 방식이 재미있네요.
위의 글에서 저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성서구절을 설교비평글의 토대를 삼으라고 조언하셨군요.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특히 예레미야서의 그 구절은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인용하게 될 것 같군요.
마음은 있었는데,
제가 구약성서에 좀 약한 탓인지 거기까지 손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2천5백년 전의 상황이 오늘 우리와 다른 게 없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섬찍하기도 하군요.
그렇다면 이런 포퓰리즘은 우리가 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숙명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구 인용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최소화하면서도 글의 힘을 실어낼 수 있는 성구인용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요.
설교자들도 자신의 논리가 궁핍할 때는
곧바로 성구를 들이대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러나 위에서 제시하신 예레미야서는 바로 제가 찾고 있는 구절입니다.
코람데오 님이 조현아 님의 대글에 대한 코멘트에서도
신선한 착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은 바울의 입장말입니다.
개척교회에서 봉사는 평신도라고 했습니까?
신학을 전공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앞서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시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건가요?
그 글이 너무 길어서 꼼꼼하게 읽지 못했는데,
나중에 한번 검토해보겠습니다.
다만 느낌으로, 다른 건 몰라도
성서에 대해서는 약간 완고한 입장인 것 같았습니다.
글쓰기의 접근 방식이 재미있네요.
위의 글에서 저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성서구절을 설교비평글의 토대를 삼으라고 조언하셨군요.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특히 예레미야서의 그 구절은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인용하게 될 것 같군요.
마음은 있었는데,
제가 구약성서에 좀 약한 탓인지 거기까지 손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2천5백년 전의 상황이 오늘 우리와 다른 게 없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섬찍하기도 하군요.
그렇다면 이런 포퓰리즘은 우리가 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숙명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구 인용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최소화하면서도 글의 힘을 실어낼 수 있는 성구인용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요.
설교자들도 자신의 논리가 궁핍할 때는
곧바로 성구를 들이대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러나 위에서 제시하신 예레미야서는 바로 제가 찾고 있는 구절입니다.
코람데오 님이 조현아 님의 대글에 대한 코멘트에서도
신선한 착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은 바울의 입장말입니다.
개척교회에서 봉사는 평신도라고 했습니까?
신학을 전공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앞서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시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건가요?
그 글이 너무 길어서 꼼꼼하게 읽지 못했는데,
나중에 한번 검토해보겠습니다.
다만 느낌으로, 다른 건 몰라도
성서에 대해서는 약간 완고한 입장인 것 같았습니다.
2006.06.01 01:55:51
평신도는 아니구요^^ 보통 나이가되면 다 다는 말씀드리기에도 부끄러운 집사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진 않았습니다.. 동생이 고신 교단 목사님이고 매형은 총신대,누나는 고신대 출신 입니다.. 가족이 그런 분위기인지라 ㅎㅎㅎ..
그냥 학창시절부터 말씀에 관심도 많고 말씀배우길 조금 좋아하는 편이라 신앙서적을 자주 읽곤 했습니다.
특히 프란시스쉐퍼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며 기독신앙관을 형성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쉐퍼 전집 자주 읽습니다만 ^^ 글이 왜그리 어려운지 간혹 신하과 철학 지식이 잛은 제게는 좀 힘겹기도 합니다만.. 이성에의 도피나 거기계시며 같은 서적은 제게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장 많이 이해하게 된것은 2년전쯤 누나의 추천으로 성도 3명일때 부터 섬기던 교회 (지금은 10명쯤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부터 입니다. 초창기에는 설교가 근 1시간 에서 1시간 반씩 이었는데 거의 성경 신학강해 수준이라 성경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쉐퍼의 서적인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면 ^^ 신앙이 다소 완곡하다고 보아야 겠지요 ^^
저의 완고한 부분은 다음에 마틴로이드 존스목사님 설교비평에 리플을 달면 교수님과의 견해차이가 있으리하 봅니다. 몇일내에 올리도록 하겟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해선 그리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정목사님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한다고 제게 질문하셨는데 이 질문은 제게 요한 계시록을 세대주의적으로 보느냐는 질문과 동일하게 이해가 됩니다(바른이해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역사적 사실"이란 언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하느냐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전제해보는 역사적 사실이란 명제의 첫번째 영역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인류의 세계에 다가올 사건들"의 의미이며, 두번째 영역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영적인 의미를 포함한 실존할 현상"의 의미 입니다. 전자의 의미라면 저는 계시록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그려 놓은 그림이 아니라는 이비장에 서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후자의 의미라면 역사적 사실을 예언한 책임이 분명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좀더 이해 하기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인류를 보시는 시각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입니다.
구약을 잘 살펴보면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구멍을 통해서 인류를 보시는 것이 매우 분명히 나타 납니다.
예를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면 하나님은 이를 "온땅이 더러워 졌다"라고 표현 하십니다. 이러한 시각은 아모스 3:2에서 더욱 노골 적으로 표현 됩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구약은 이러한 방식의 표현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시대도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구약의 교회시대와 동일하다고 생각 합니다.
즉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보시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저는 계시록을 봅니다. 즉 계시록은 인류의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온땅이요 인류를 보는 창문인 신약교회세대에 관한 이야기 인것입니다.
계시록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물론 목사님에게 배운 것 이지만)을 한마디로 요약하지면 간음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길 외쳤던 선지자들의 말씀처럼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어 간음(배도)한 교회세대를 바라보며 회개를 촉사도요한의 외침으로 보고 있는 것 입니다.
계시록 1장 19절과 20절은 이러한 시각 즉 계시록의 말씀이 세상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기록이 아니라 일곱 촛대 즉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교회 와 그 일곱교회로 대표되는 모든 교회 - 모든 성도 -들과 , 일곱 별 즉 당시의 일곱교회의 교회의 치리자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모든 교회의 목자들을에 관한 기록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세상에 일어날 전쟁이야기가 자연재앙 이야기 즉 위에서 언급한 전자의 역사적 사건의 개념이 아니라 거짓목자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배도의 길을 가계되는 교회세대를 향하여 돌이키고 회개할 것을 명령하시는 회개의 외침이요 복음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 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부족한 의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 쓰려하니 ^^ 수정은 엄두도 내지 못하겠습니다.
맞춤법 맞지않는 부분들 양해 바랍니다 ^^
그냥 학창시절부터 말씀에 관심도 많고 말씀배우길 조금 좋아하는 편이라 신앙서적을 자주 읽곤 했습니다.
특히 프란시스쉐퍼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며 기독신앙관을 형성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쉐퍼 전집 자주 읽습니다만 ^^ 글이 왜그리 어려운지 간혹 신하과 철학 지식이 잛은 제게는 좀 힘겹기도 합니다만.. 이성에의 도피나 거기계시며 같은 서적은 제게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장 많이 이해하게 된것은 2년전쯤 누나의 추천으로 성도 3명일때 부터 섬기던 교회 (지금은 10명쯤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부터 입니다. 초창기에는 설교가 근 1시간 에서 1시간 반씩 이었는데 거의 성경 신학강해 수준이라 성경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쉐퍼의 서적인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면 ^^ 신앙이 다소 완곡하다고 보아야 겠지요 ^^
저의 완고한 부분은 다음에 마틴로이드 존스목사님 설교비평에 리플을 달면 교수님과의 견해차이가 있으리하 봅니다. 몇일내에 올리도록 하겟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해선 그리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정목사님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한다고 제게 질문하셨는데 이 질문은 제게 요한 계시록을 세대주의적으로 보느냐는 질문과 동일하게 이해가 됩니다(바른이해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역사적 사실"이란 언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하느냐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전제해보는 역사적 사실이란 명제의 첫번째 영역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인류의 세계에 다가올 사건들"의 의미이며, 두번째 영역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영적인 의미를 포함한 실존할 현상"의 의미 입니다. 전자의 의미라면 저는 계시록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그려 놓은 그림이 아니라는 이비장에 서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후자의 의미라면 역사적 사실을 예언한 책임이 분명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좀더 이해 하기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인류를 보시는 시각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입니다.
구약을 잘 살펴보면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구멍을 통해서 인류를 보시는 것이 매우 분명히 나타 납니다.
예를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면 하나님은 이를 "온땅이 더러워 졌다"라고 표현 하십니다. 이러한 시각은 아모스 3:2에서 더욱 노골 적으로 표현 됩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구약은 이러한 방식의 표현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시대도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구약의 교회시대와 동일하다고 생각 합니다.
즉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보시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저는 계시록을 봅니다. 즉 계시록은 인류의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온땅이요 인류를 보는 창문인 신약교회세대에 관한 이야기 인것입니다.
계시록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물론 목사님에게 배운 것 이지만)을 한마디로 요약하지면 간음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돌아오길 외쳤던 선지자들의 말씀처럼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어 간음(배도)한 교회세대를 바라보며 회개를 촉사도요한의 외침으로 보고 있는 것 입니다.
계시록 1장 19절과 20절은 이러한 시각 즉 계시록의 말씀이 세상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기록이 아니라 일곱 촛대 즉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교회 와 그 일곱교회로 대표되는 모든 교회 - 모든 성도 -들과 , 일곱 별 즉 당시의 일곱교회의 교회의 치리자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모든 교회의 목자들을에 관한 기록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세상에 일어날 전쟁이야기가 자연재앙 이야기 즉 위에서 언급한 전자의 역사적 사건의 개념이 아니라 거짓목자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배도의 길을 가계되는 교회세대를 향하여 돌이키고 회개할 것을 명령하시는 회개의 외침이요 복음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 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부족한 의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 쓰려하니 ^^ 수정은 엄두도 내지 못하겠습니다.
맞춤법 맞지않는 부분들 양해 바랍니다 ^^
2006.06.01 15:31:22
목사님의 설교비평이 날로 날로 뜨거운 활화산으로 달구워 짐을 보면서
그 깊이 있는 비평을 실감 하게 됩니다.
전문적인 지식 이 없어 정확한 표현이 어렵겠다. 생각합니다.
설혹 동문서답 하더라도 용서하시고 너그럽게 수용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도르가님"의 글 중에서 다음의 글로 우선 은혜 을 받았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를 외치며 아브라함의 3일 길을 걸어간 키에르케고르 가
십자가 앞에서 동지를 구하는 것은 오히려 패역한 일이라며 홀로 외로운 길을
고독과 함께 걸어간 그의 길이 생각납니다.----
위에 말을 마음에 세기면서
조 현아님의 생각에 저도 먼저 공감 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 의 표현과 상대방 의 다른 생각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는
태도는 아쉬움으로 생각이 되여 집니다.
정 목사님의 비평을 읽으면서 숨을 고르지 않고 쓰신 속상한 글로 보여 지거든요,
기도 많이 하신 분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말입니다.
저도 무어라고 꼭 짚어서 우선은 말 할 수 없으나
조 현아님의 그 속상하신 그 대목을 이해할 것 갔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잘 조율해 보시기 바랩니다.
목사님의 지적은 설교자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설교 을 한다는 것은
그 폐해를 기독교 사 적 관점 에서 볼 때 많은 오류를 범한, 좋은 것이나 다 좋은 것은 아니다란
가장 평범한 진리 을 말씀 하셨는데 이런 면에서 현아님께서 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잠정성에서)--충분한설명......
그러나 현아님과 목사님의 수준 높은 기독교 신비 을 말씀 할 때 큰 기대를 해 보겠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신학적 깊이와 그 무게에 깊이 감명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다만 내 마음 한구석에 소리가 있는데
대단히 죄송하고 송구한 말씀이나 목사님께서 일 년에 20일씩 기도를 3년만 하시고
이글을 쓰신다면 어떠한 말씀을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늘 들은 이야기지만 어느 유명하신 신학교 교수님이 설교를 하시고 내려
오셨는데 인사 하면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참 좋으신 되 마음에 감동이 없어 아쉽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그때 그분만 아니라 지금도 종종 우리가 경험한 사실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우매한 성도로만 매도 할 꺼 야 이거지요
목사님의 말씀 과 같이 성서의 텍스트를 벗어난 신학 적 착상에 심화로도 주제를 벗어난
견강부회 같은 설교라 할지라도 그 설교로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는데
과연 그게 무어야 이거지요, 값싼 은혜의 산물로만 매도 할 꺼냐 이겁니다.
목사님의 지적이 감히 틀렸다 이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그 영구 대상 말입니다.
더 깊으신 목사님의 성령님의 감동에 현학적 논평이 한국 교회 목사님들에 더 큰 발전의
디딤돌의 역할로 진전되기를 기원해봅니다.
그 깊이 있는 비평을 실감 하게 됩니다.
전문적인 지식 이 없어 정확한 표현이 어렵겠다. 생각합니다.
설혹 동문서답 하더라도 용서하시고 너그럽게 수용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도르가님"의 글 중에서 다음의 글로 우선 은혜 을 받았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를 외치며 아브라함의 3일 길을 걸어간 키에르케고르 가
십자가 앞에서 동지를 구하는 것은 오히려 패역한 일이라며 홀로 외로운 길을
고독과 함께 걸어간 그의 길이 생각납니다.----
위에 말을 마음에 세기면서
조 현아님의 생각에 저도 먼저 공감 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 의 표현과 상대방 의 다른 생각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는
태도는 아쉬움으로 생각이 되여 집니다.
정 목사님의 비평을 읽으면서 숨을 고르지 않고 쓰신 속상한 글로 보여 지거든요,
기도 많이 하신 분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말입니다.
저도 무어라고 꼭 짚어서 우선은 말 할 수 없으나
조 현아님의 그 속상하신 그 대목을 이해할 것 갔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잘 조율해 보시기 바랩니다.
목사님의 지적은 설교자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설교 을 한다는 것은
그 폐해를 기독교 사 적 관점 에서 볼 때 많은 오류를 범한, 좋은 것이나 다 좋은 것은 아니다란
가장 평범한 진리 을 말씀 하셨는데 이런 면에서 현아님께서 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잠정성에서)--충분한설명......
그러나 현아님과 목사님의 수준 높은 기독교 신비 을 말씀 할 때 큰 기대를 해 보겠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신학적 깊이와 그 무게에 깊이 감명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다만 내 마음 한구석에 소리가 있는데
대단히 죄송하고 송구한 말씀이나 목사님께서 일 년에 20일씩 기도를 3년만 하시고
이글을 쓰신다면 어떠한 말씀을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늘 들은 이야기지만 어느 유명하신 신학교 교수님이 설교를 하시고 내려
오셨는데 인사 하면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참 좋으신 되 마음에 감동이 없어 아쉽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그때 그분만 아니라 지금도 종종 우리가 경험한 사실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우매한 성도로만 매도 할 꺼 야 이거지요
목사님의 말씀 과 같이 성서의 텍스트를 벗어난 신학 적 착상에 심화로도 주제를 벗어난
견강부회 같은 설교라 할지라도 그 설교로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는데
과연 그게 무어야 이거지요, 값싼 은혜의 산물로만 매도 할 꺼냐 이겁니다.
목사님의 지적이 감히 틀렸다 이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그 영구 대상 말입니다.
더 깊으신 목사님의 성령님의 감동에 현학적 논평이 한국 교회 목사님들에 더 큰 발전의
디딤돌의 역할로 진전되기를 기원해봅니다.
2006.06.01 15:44:20
민들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일 년에 20일씩 기도를 3년만 하시고 이 글을 쓰신다면...."
하고 정중하게 충고(?)또는 부탁하면서 쓰신 걸 보면, 민들래님의 눈에는
정목사님이 기도는 별로하지 않으면서 글만 쓰는 사람으로 비친 모양이군요.
무얼 말하려는건지 대충 감은 잡지만 제게는 낯뜨겁게 느껴지는군요.
특히, "일년에 20일씩" 그것도 "3년만"이라고 구체적으로 숫자를 적시한 부분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일 년에 20일씩 기도를 3년만 하시고 이 글을 쓰신다면...."
하고 정중하게 충고(?)또는 부탁하면서 쓰신 걸 보면, 민들래님의 눈에는
정목사님이 기도는 별로하지 않으면서 글만 쓰는 사람으로 비친 모양이군요.
무얼 말하려는건지 대충 감은 잡지만 제게는 낯뜨겁게 느껴지는군요.
특히, "일년에 20일씩" 그것도 "3년만"이라고 구체적으로 숫자를 적시한 부분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2006.06.01 20:25:07
민들래님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똑소리님처럼 민들래님이 섬뜩한 '오해와 오버'하심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길이 없네요.
일년에 20일씩 기도 3년이라.....
씁슬해지네요...
그러나 저 또한 똑소리님처럼 민들래님이 섬뜩한 '오해와 오버'하심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길이 없네요.
일년에 20일씩 기도 3년이라.....
씁슬해지네요...
2006.06.02 01:05:49
흠.. 설교비평을 설교비평으로 받아들여야지 누구의 신앙관이나 신앙생활방식이 옳으냐로 지나치게 치달으면, 득보다 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야지, "나는 무시해도 좋을만한 몇가지 흠이 있긴 하지만 옳은 쪽에 서 있고, 너는 뭣 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틀린 쪽에 서 있어"라는 생각으로 서로를 대하면 과연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진정한 소통이 있을런지..
서로 분명히 다른 하나님 인식과 성서관 및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데, 한쪽이 뭐라 강요를 한다고 다른쪽이 수긍할 수 있을까요? 무식한 제가 볼때는 "아니올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안하시는) 걸 사람이 할 수는 없겠지요. 성서에 근거한 자신의 신앙관은 무오하다(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자신감, 그 확신. 저는 없습니다. 그런 확신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저는 다 알지 못하거든요...
아무튼, 서로 배우고 서로 존중하는 다비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서로 분명히 다른 하나님 인식과 성서관 및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데, 한쪽이 뭐라 강요를 한다고 다른쪽이 수긍할 수 있을까요? 무식한 제가 볼때는 "아니올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안하시는) 걸 사람이 할 수는 없겠지요. 성서에 근거한 자신의 신앙관은 무오하다(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자신감, 그 확신. 저는 없습니다. 그런 확신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저는 다 알지 못하거든요...
아무튼, 서로 배우고 서로 존중하는 다비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2006.06.02 01:09:17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적인 기준에서 또 바르게 비평하시는 목사님의 비평을 읽으면서 어려운 부분은 좀 넘어가기도 하고 나름대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을 조금이라도 만나면 탁월함을 느끼며 만족을? 느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함니다. 혹시나 제가 목사님께서 비평을 하시는 것을 즐거운 마음이 앞서서 그것을 누리는 것에 중독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비평은 즐김의 대상은 아닐건데 말입니다.저도 어설프게 나마 제가 운영하면서 또 제가 더 많이 방문하는 카페를 보듬어 가는 중에 몇년정도의 시간을 꿋꿋이 운영해 가야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짧은 비평글을 저도 써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적당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고급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저서 분리수거 하는 수고로움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복음적인 기준에서 또 바르게 비평하시는 목사님의 비평을 읽으면서 어려운 부분은 좀 넘어가기도 하고 나름대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을 조금이라도 만나면 탁월함을 느끼며 만족을? 느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함니다. 혹시나 제가 목사님께서 비평을 하시는 것을 즐거운 마음이 앞서서 그것을 누리는 것에 중독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비평은 즐김의 대상은 아닐건데 말입니다.저도 어설프게 나마 제가 운영하면서 또 제가 더 많이 방문하는 카페를 보듬어 가는 중에 몇년정도의 시간을 꿋꿋이 운영해 가야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짧은 비평글을 저도 써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적당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고급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저서 분리수거 하는 수고로움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2006.06.02 11:11:41
똑소리님! 박진님 !댓글 감사합니다.
허지만 좀 서운한 마음이 드네요 왜야구요?
그냥 아주친절한 사이 좀 어렵게 부탁해보는 심정으로 글을 올렸거든요,
두분이 보신것 같이 느끼셨다면 정목사님에게 더 죄송하구 미안해 집니다.
그러나 두분이 생각 하는것 같이 저를 괘심하게 생각 하시리라고는 생각치않커든요,
왜야면 저의 글쓰는 수준이나 저에 글속에 저에 진심을 충분히 아셨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골탕 멱이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구요 그냥 순진하게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다 이거입니다.
저는 목사님 의 논평글에 깊이 감명을 받고 신앙에 눈도 넓어지고 있습도 부인하지 안습니다.
다만 다비아는 서로 존중하며 솔직하며 순수한마음으로 믿음의 지평이 열려 지기를 소망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허지만 좀 서운한 마음이 드네요 왜야구요?
그냥 아주친절한 사이 좀 어렵게 부탁해보는 심정으로 글을 올렸거든요,
두분이 보신것 같이 느끼셨다면 정목사님에게 더 죄송하구 미안해 집니다.
그러나 두분이 생각 하는것 같이 저를 괘심하게 생각 하시리라고는 생각치않커든요,
왜야면 저의 글쓰는 수준이나 저에 글속에 저에 진심을 충분히 아셨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골탕 멱이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구요 그냥 순진하게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다 이거입니다.
저는 목사님 의 논평글에 깊이 감명을 받고 신앙에 눈도 넓어지고 있습도 부인하지 안습니다.
다만 다비아는 서로 존중하며 솔직하며 순수한마음으로 믿음의 지평이 열려 지기를 소망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2006.06.02 16:51:36
민들래님!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니, 제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딴에는, 짧은 글이지만 몇 번 손질하면서 쓴거였는데.
결국 님의 마음을 긁어 놓았군요.
늦은감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상한 마음이 얼른 풀렸으면 좋겠군요.
앞으로는 제 느낌을 전달하는데도 좀 더 신중하겠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니, 제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딴에는, 짧은 글이지만 몇 번 손질하면서 쓴거였는데.
결국 님의 마음을 긁어 놓았군요.
늦은감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상한 마음이 얼른 풀렸으면 좋겠군요.
앞으로는 제 느낌을 전달하는데도 좀 더 신중하겠습니다.
2006.06.02 20:13:07
민들래님!
저도 자꾸 똑소리님을 따라하게 되네요.
제 '경솔함'에 대한 마음아픔이.....
제 소견으론 정 목사님의 이런 글들이 단지 학문적이고 추상적인 현학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도와 치열한 묵상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민들래님의 글을 읽고서 저도 똑소리님하고 비슷하게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댓글을 적고 말았네요 ......T.T
서운한 마음이 드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또한 제 느낌을 전달하는데도 좀 더 신중하겠습니다.
저도 자꾸 똑소리님을 따라하게 되네요.
제 '경솔함'에 대한 마음아픔이.....
제 소견으론 정 목사님의 이런 글들이 단지 학문적이고 추상적인 현학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도와 치열한 묵상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민들래님의 글을 읽고서 저도 똑소리님하고 비슷하게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댓글을 적고 말았네요 ......T.T
서운한 마음이 드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또한 제 느낌을 전달하는데도 좀 더 신중하겠습니다.
2006.06.07 10:36:28
똑소리님. 박진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월요일 사무실에들려 다비아로 곧장 왔습니다.
생각치도 않게 두분께서 이렇게 안하셔도 되는대 미안하다는 표현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 습니다.
저야 그보다 더한 질책을 받아도 할말이 없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을수있는 깊이있는 신학적
가르침이나 학자와 평신도간에 서로가 다른 견해와 차이를 마음을 터놓고 얼로를 열어야 진리의
보화를 얻지않겠느냐 하는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우문을 했던것입니다.
앞으로도 혹 이런 우문이 있을 때 에도 저같은 평신도도 잘 이해 할수 있도록 지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변함 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두분 삶 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월요일 사무실에들려 다비아로 곧장 왔습니다.
생각치도 않게 두분께서 이렇게 안하셔도 되는대 미안하다는 표현을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 습니다.
저야 그보다 더한 질책을 받아도 할말이 없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을수있는 깊이있는 신학적
가르침이나 학자와 평신도간에 서로가 다른 견해와 차이를 마음을 터놓고 얼로를 열어야 진리의
보화를 얻지않겠느냐 하는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우문을 했던것입니다.
앞으로도 혹 이런 우문이 있을 때 에도 저같은 평신도도 잘 이해 할수 있도록 지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변함 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두분 삶 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2006.06.12 16:20:45
토요일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듣는 설교입니다.
채널을 이리 저리 옮기는 날이 많아지더군요.
방송으로 들리는 말씀이 많이 답답했나 봅니다.
목사님의 글을 보니 원인을 알게되는군요.
평범한 양들은
어디가서 말씀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나요?
부산에서--한 평신도가
채널을 이리 저리 옮기는 날이 많아지더군요.
방송으로 들리는 말씀이 많이 답답했나 봅니다.
목사님의 글을 보니 원인을 알게되는군요.
평범한 양들은
어디가서 말씀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나요?
부산에서--한 평신도가
2006.06.12 19:40:09
저는 하나님의 음성은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지만 풀기 어려운 문제로 고민할때는 성경귀절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성이 들리는 경우는 확실치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뇌 기능 문제로 환청이 들릴 수도 있고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반복적으로 음성이 들리는 경우 (이 경우 상당부분 환청일 가능성이 큽니다) 본인에게 안좋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부분은 일반인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영적은사가 있으신 목회자 분들이 신중하게 접근해야될 분야입니다. 아무나 무턱대고 물러가라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또 한가지 문제로는 신비한 경험을 자꾸 추구하게되면 악한영들도 그것을 잘 알기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접근한다는 것 입니다. 이 경우 개인 스스로는 판별이 매우 어렵습니다.
( 이 문제는 자세히 언급하기 힘든 점이 많은데 예수님의 공생애 중 마지막까지 치유사역을 하셨고 권세를 주셨으므로 회피할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치유부분이 무속화된 경우가 있고 신문에 실린 잘못된 기사로 인하여 거부하는 크리스찬들이 많은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대형교회이면서 고학력자 가정분들이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더군요. 치유가 불가능한 자녀나 질병으로 고생중인 분들을 보면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로 결론을 내리고 계시더군요. 순복음 조용기 목사님의 경우 선포로 질병을 치료하신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로 떠나가란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 정체를 스스로 밝혀내야하는데 스스로는 밝혀내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 부분은 이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도 간증을 처음에 많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다 뒤져가면서 찾아서 들었는데 그 당시 간증은 저에게 힘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 간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되더군요. 바울이 무익하다고 표현한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란것을 느꼈습니다. 교회에서 영성이 쎈(?) 분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처음엔 말씀으로 시작하다가 뒷부분은 간증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더군요. 이런 경우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크리스찬이라면 우리가 지금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이 아니란것은 바로 알 수 있는것입니다. 성령과 악령의 선택문제로 치환시키는것은 정말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이건 실존철학 쯤에서 풀어야할 문제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도 귀중한 책입니다. 어렵다고 피해갈 말씀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1장 3절에 '이책을 읽는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들이 복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읽는 자는 목회자를 듣는자들은 성도들을 가르키며 이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는 계시록의 7가지 복 중에 첫번째 복입니다.
저도 예수님 말씀과 성경을 알아가는 초신자라서 미흡한게 많지만 주제넘게 몇자 적어봅니다.
( 이 문제는 자세히 언급하기 힘든 점이 많은데 예수님의 공생애 중 마지막까지 치유사역을 하셨고 권세를 주셨으므로 회피할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치유부분이 무속화된 경우가 있고 신문에 실린 잘못된 기사로 인하여 거부하는 크리스찬들이 많은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대형교회이면서 고학력자 가정분들이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더군요. 치유가 불가능한 자녀나 질병으로 고생중인 분들을 보면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로 결론을 내리고 계시더군요. 순복음 조용기 목사님의 경우 선포로 질병을 치료하신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로 떠나가란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 정체를 스스로 밝혀내야하는데 스스로는 밝혀내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 부분은 이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도 간증을 처음에 많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다 뒤져가면서 찾아서 들었는데 그 당시 간증은 저에게 힘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 간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되더군요. 바울이 무익하다고 표현한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란것을 느꼈습니다. 교회에서 영성이 쎈(?) 분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처음엔 말씀으로 시작하다가 뒷부분은 간증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더군요. 이런 경우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크리스찬이라면 우리가 지금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이 아니란것은 바로 알 수 있는것입니다. 성령과 악령의 선택문제로 치환시키는것은 정말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이건 실존철학 쯤에서 풀어야할 문제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도 귀중한 책입니다. 어렵다고 피해갈 말씀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1장 3절에 '이책을 읽는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들이 복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읽는 자는 목회자를 듣는자들은 성도들을 가르키며 이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는 계시록의 7가지 복 중에 첫번째 복입니다.
저도 예수님 말씀과 성경을 알아가는 초신자라서 미흡한게 많지만 주제넘게 몇자 적어봅니다.
2006.06.23 21:51:06
바르트가 언젠가 언급했듯, 신학적 사고도 신앙적 사고도 결국 자기 리얼리티와의 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아울러 강조하시고, 대사회 현실 가운데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살아지게 하는지에 대한 석의가 돋보이는 정용섭 박사님의 글입니다.
님의 설교 비평은 매우 적실한 시도인 듯 합니다. 갈수록 대형화하는 교회에서 말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개방된 질문이 있지 않는한 부패는 가속화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참 묘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 그 리얼리는 복잡한 것일까요? 아니면 간단한 것일까요? 소시민의 소박한 삶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고 그 자리로 똬리를 튼다는 것은 어쩌면 정필도 목사님 같은 이들의 목회성공의 원천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와 너와의 그 관계항의 울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접촉하는 그 신앙형태는 가장 직접적인 신앙의 경험이겠죠.
화이트헤드의 occasion라는 용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도, 그것인 인간적인 주체로 흡입될 때는 하나의 '계시사태' 가 되겠죠. 케리그마는 '계시사건'의 카이로스적 시간을 그토록 웅변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삶의 자리에서 어떤 '하나님 나라'를 예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우리네 삶의 자리와, 계시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계시되는 그 사태의 양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우리네 삶의 자리를 뚫고 들어오는 말씀의 섬광을 지금과, 여기, 이곳과 저곳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으로 풀어보려고 하는 정용섭 님의 신학적 리얼리티는 가열찹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발생하는 그 계시사태란 것이 우리의 신학적 사고 가운데에서만 밝혀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눌해 보이고, 어리석어보이며, 말씀의 자리를 지금 이 현실의 자리에 다소 억지스럽게 석의해내는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에서 많은 이들이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마도 그가 계시사태의 직접성을 일상의 언어로 그려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극단적인 주관적 체험의 논리로 이탈된다면 공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기반을 찾기는 어려워지겠지만 서두요.
하나님의 큰일이 지금 여기서 현재화 되는 것은,우리의 신학적 통찰 속에 있는 희망의 운용만을 아닐 겁니다. 탁월한 신학적, 철학적, 사회적 이해를 갖추고 있었던 몰트만의 저서들이 때로는 지독하게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가, 기독교 신앙의 내재적인 계시사태의 체험을 지나치게 사변화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차일즈가 공동체 가운데 형성되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계시사태를 성서학 가운데서 '정경화 과정' 으로 표현했다면, 실천적 현장에서 뉴비긴 같은 이들은 말씀의 해석이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정위된다고 본 것은 탁견이겠지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는, 우리네 삶의 현실을 투지하여 들어오지만, 그것을 무시간적인 신학적 사고가운데 수렴시켜서는 안되겠지요. 정용섭 님의 글에서는 탁월한 신학적 통찰과, 말씀에 대한 석의가 늘 돋보이지만, 좀 더 너른 측면에서의 교회공동체의 증언과 그 현상이 화석화되는 경향도 없지는 않습니다.
거치고 어리석은 설교, 혹은 그 복음의 역사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유인가가 단순히 바알신앙과, 맘몬신앙이 아닌 좀 더 직접적인 계시사태의 촉발을 장려하는 그 관계항들이라면 우리는 좀 더 그 내면적 영성의 좌소로 전진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요?
말과 글로 나타냈지만, 이면에 생각은 숨기워진 느낌이군요. 문자의 행간을 넘어, 제 생각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님의 설교 비평은 매우 적실한 시도인 듯 합니다. 갈수록 대형화하는 교회에서 말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개방된 질문이 있지 않는한 부패는 가속화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참 묘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 그 리얼리는 복잡한 것일까요? 아니면 간단한 것일까요? 소시민의 소박한 삶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고 그 자리로 똬리를 튼다는 것은 어쩌면 정필도 목사님 같은 이들의 목회성공의 원천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와 너와의 그 관계항의 울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접촉하는 그 신앙형태는 가장 직접적인 신앙의 경험이겠죠.
화이트헤드의 occasion라는 용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도, 그것인 인간적인 주체로 흡입될 때는 하나의 '계시사태' 가 되겠죠. 케리그마는 '계시사건'의 카이로스적 시간을 그토록 웅변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삶의 자리에서 어떤 '하나님 나라'를 예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우리네 삶의 자리와, 계시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계시되는 그 사태의 양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우리네 삶의 자리를 뚫고 들어오는 말씀의 섬광을 지금과, 여기, 이곳과 저곳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으로 풀어보려고 하는 정용섭 님의 신학적 리얼리티는 가열찹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발생하는 그 계시사태란 것이 우리의 신학적 사고 가운데에서만 밝혀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눌해 보이고, 어리석어보이며, 말씀의 자리를 지금 이 현실의 자리에 다소 억지스럽게 석의해내는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에서 많은 이들이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마도 그가 계시사태의 직접성을 일상의 언어로 그려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극단적인 주관적 체험의 논리로 이탈된다면 공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기반을 찾기는 어려워지겠지만 서두요.
하나님의 큰일이 지금 여기서 현재화 되는 것은,우리의 신학적 통찰 속에 있는 희망의 운용만을 아닐 겁니다. 탁월한 신학적, 철학적, 사회적 이해를 갖추고 있었던 몰트만의 저서들이 때로는 지독하게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가, 기독교 신앙의 내재적인 계시사태의 체험을 지나치게 사변화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차일즈가 공동체 가운데 형성되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계시사태를 성서학 가운데서 '정경화 과정' 으로 표현했다면, 실천적 현장에서 뉴비긴 같은 이들은 말씀의 해석이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정위된다고 본 것은 탁견이겠지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는, 우리네 삶의 현실을 투지하여 들어오지만, 그것을 무시간적인 신학적 사고가운데 수렴시켜서는 안되겠지요. 정용섭 님의 글에서는 탁월한 신학적 통찰과, 말씀에 대한 석의가 늘 돋보이지만, 좀 더 너른 측면에서의 교회공동체의 증언과 그 현상이 화석화되는 경향도 없지는 않습니다.
거치고 어리석은 설교, 혹은 그 복음의 역사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유인가가 단순히 바알신앙과, 맘몬신앙이 아닌 좀 더 직접적인 계시사태의 촉발을 장려하는 그 관계항들이라면 우리는 좀 더 그 내면적 영성의 좌소로 전진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요?
말과 글로 나타냈지만, 이면에 생각은 숨기워진 느낌이군요. 문자의 행간을 넘어, 제 생각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2006.06.24 00:23:49
칸트 님,
정말 칸트의 글처럼 쓰셨군요.
형식과 내용은 칸트가 아니지만
이성과 판단에서 정밀성이 느꺼진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대체로 동의합니다.
사실 저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그게 화이트헤드의 '오케전' 개념인지 모르겠지만,
이렇쿵 저러쿵 재단하는 건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주관적 사유가 개입할 수 있는
엄청난 비밀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도박꾼들도 비난할 수 없구요,
마약 복용자들도 비난할 생각이 없어요.
어쩌면 그들이 경험한 모종의 감정, 느낌, 관계 같은 것들이
나의 삶 경험보다 뛰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어디 그런 것만이겠어요.
총을 머리에 대고 하는,
룰렛 게임인가 하는 그런 사람들을 뭐라 할 수도 없어요.
거기에는 그들만의 어떤 삶의 계기가 숨어 있을 테니까요.
저는 문선명 할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와 유사한, 소위 정통교회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말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다는 걸 압니다.
다만 저는 동일한 교회전통과 신앙고백을 나누는 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주고 있을 뿐이죠.
칸트 님은 많은 생각할 주제를 제시했군요.
신학적 사유와 삶의 문제,
몰트만의 신학이 관념적이라고 느꼈다는 사실,
그건 정확한 지적이 아닌 것 같네요.
예컨대 ‘존재’를 어떻게 관념적으로,
더 정확하게는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직 모든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과도기를 지나면서
그 마지막까지를 포함해서만 설명이 조금이라도 가능한
그런 존재 문제를 어떻게 실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아마 칸트 님도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정필도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그런 신앙형태에서
소위 민중들이 경험하는 열정적인 신앙경험에 담긴
어떤 소중한 신앙적 계기를 추려낼 필요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종교학자나 사회학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는지요.
저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의 기준에서
긍정할 건 긍정하고 부정할 건 부정할 뿐이에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정말 칸트의 글처럼 쓰셨군요.
형식과 내용은 칸트가 아니지만
이성과 판단에서 정밀성이 느꺼진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대체로 동의합니다.
사실 저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그게 화이트헤드의 '오케전' 개념인지 모르겠지만,
이렇쿵 저러쿵 재단하는 건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주관적 사유가 개입할 수 있는
엄청난 비밀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도박꾼들도 비난할 수 없구요,
마약 복용자들도 비난할 생각이 없어요.
어쩌면 그들이 경험한 모종의 감정, 느낌, 관계 같은 것들이
나의 삶 경험보다 뛰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어디 그런 것만이겠어요.
총을 머리에 대고 하는,
룰렛 게임인가 하는 그런 사람들을 뭐라 할 수도 없어요.
거기에는 그들만의 어떤 삶의 계기가 숨어 있을 테니까요.
저는 문선명 할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와 유사한, 소위 정통교회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말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다는 걸 압니다.
다만 저는 동일한 교회전통과 신앙고백을 나누는 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주고 있을 뿐이죠.
칸트 님은 많은 생각할 주제를 제시했군요.
신학적 사유와 삶의 문제,
몰트만의 신학이 관념적이라고 느꼈다는 사실,
그건 정확한 지적이 아닌 것 같네요.
예컨대 ‘존재’를 어떻게 관념적으로,
더 정확하게는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직 모든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 과도기를 지나면서
그 마지막까지를 포함해서만 설명이 조금이라도 가능한
그런 존재 문제를 어떻게 실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아마 칸트 님도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정필도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그런 신앙형태에서
소위 민중들이 경험하는 열정적인 신앙경험에 담긴
어떤 소중한 신앙적 계기를 추려낼 필요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종교학자나 사회학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는지요.
저는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의 기준에서
긍정할 건 긍정하고 부정할 건 부정할 뿐이에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2006.06.24 18:40:07
제가 내던진 말글 들에 대한 정용섭 박사님의 답에는 이해의 깊이가 묻어나는 군요. 이 정도로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하고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교환이 이루어 졌다는 것 또한 즐겁기도 하구요.
어쩌면, 소위 먹물 들었다고 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조바심이 아니었을까요. 말씀의 리얼리티, 기독교의 리얼리티, 본질음성을 건져올리려는 우리들 모두에 대한 노파심이었겠죠. 갈수록 삶의 일상은 어려운 문제가 되고, 세계를 이해하는 개념과, 관념의 도구들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성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며, 그 운동하는 개념자가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는 귀중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의 문제의식과 사유틀, 신학적 기획은 언제나 가치있는 것이구요. 그러나 현실을 말하는데, 존재를 아울러 말하며, 존재를 넘어선 가장 나이브한 실체까지 말하기엔 몰트만이 작업이 버거워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갈래, 저 갈래로 흩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신학적, 철학적 개념을, 우리네 삶의 가장 소박한 좌소로 연결짓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겠죠..^^ 그것은 일상의 논리와, 철학적, 신학적 논리를 부단히 성찰한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것이겠구요..
정용섭 님에 대한 기대가 크기에, 더더욱 바라는 것도 많은 것이겠지요. 많은 이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조국 땅 위에 생각하는 신학도, 가열차게 말씀의 현실성과, 기독교의 본질을 아울러 매개시키려는 님의 시도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기 때문일 겁니다.
즐거운 마음입니다. 들을 귀가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이성을 가지신 정용섭 목사님의 생각을 최대한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본의도 이런 기회로 더욱 잘 알게 되었구요. 감사합니다. 늘 건승하소서.
어쩌면, 소위 먹물 들었다고 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조바심이 아니었을까요. 말씀의 리얼리티, 기독교의 리얼리티, 본질음성을 건져올리려는 우리들 모두에 대한 노파심이었겠죠. 갈수록 삶의 일상은 어려운 문제가 되고, 세계를 이해하는 개념과, 관념의 도구들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성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며, 그 운동하는 개념자가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는 귀중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의 문제의식과 사유틀, 신학적 기획은 언제나 가치있는 것이구요. 그러나 현실을 말하는데, 존재를 아울러 말하며, 존재를 넘어선 가장 나이브한 실체까지 말하기엔 몰트만이 작업이 버거워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갈래, 저 갈래로 흩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신학적, 철학적 개념을, 우리네 삶의 가장 소박한 좌소로 연결짓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겠죠..^^ 그것은 일상의 논리와, 철학적, 신학적 논리를 부단히 성찰한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것이겠구요..
정용섭 님에 대한 기대가 크기에, 더더욱 바라는 것도 많은 것이겠지요. 많은 이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조국 땅 위에 생각하는 신학도, 가열차게 말씀의 현실성과, 기독교의 본질을 아울러 매개시키려는 님의 시도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기 때문일 겁니다.
즐거운 마음입니다. 들을 귀가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이성을 가지신 정용섭 목사님의 생각을 최대한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본의도 이런 기회로 더욱 잘 알게 되었구요. 감사합니다. 늘 건승하소서.
2006.07.01 09:31:11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목사님글에 대한 댓글 입니다.
목사님 글에 대한 비평에 목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들 평범한 일반 교인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하나님사랑7 하나님사랑7 ssja5302@hanmail.net Y 2006.06.19 13:21:33
길고 긴 내용의 글을 참 의미있고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그 중심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면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고백해 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사역이 곧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이
있다고 고백해 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통해서 강하게 일하시는 신실한 분이시기에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누어 주신 글 잘읽었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글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 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로서 세워지기 위하여
하나님만 잠잠이 바라보아야 함을 고백해 봅니다.
탱이님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안에서 강건하시며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탱이 탱이 http://blog.daum.net/chilchundo Y 2006.06.19 15:14:56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빨간_장미 빨간_장미 rich1961@hanmail.net Y 2006.06.22 11:25:50
긴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아무리 잘짜여진 집이나 시나 작문일찌라도 자신이 만든 집이나 글이 행복할수없다면 감동이 없다면 아무의미없는 공간이나 문자에 불가하겠지요 그러나 자신이 지은집이나 글에 자신의 영혼과 사랑을 부었다면 그것은 타자들에게 충분한 메세지가 아닐까요 성경이 성령의 감동없이 쓰여지지 않았다면 문제의 요지가 많듯이 정필도 목사님도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영혼과 사랑으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요 성경에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렴 수영로 교회의 부흥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 같네요 모두가 성령의 민감한 자가 되면 다 보일텐데 감사합니다,
탱이 탱이 http://blog.daum.net/chilchundo Y 2006.06.22 11:34:35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고결론을 내리시면
이 글을 잘 못읽으신것 같네요
한나 한나 hee-jinmam@hanmail.net Y 2006.06.26 17:40:16
윗 평자는 수영로교회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폄하한 대책없는 철학자이군요. 철학자는 역시 철학자, 은혜를 모르는 철학자의 신세 한탄의 평글이군요.쯧쯧쯧~
창다이 창다이 http://@joins.com Y 2006.07.01 09:04:19
장문의 내용을 다 읽고나니 머리가 아프군요 역시 철학자적 안목으로 바라보시며 냉철하게 판단하신것 같습니다. 많은 부분이 현실적 학문의 기준으로 볼때 사실인 것 같습니다.이 한편의 글을 쓰시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며 존경합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종교가 기독교 인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아직 현실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설명할수 없는 많은 부분에 대한 내적 체험이 없으신것 같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으신것 같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의 많은 오류와 문제점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믿으신다면 결론은 듣는 개개인의 성도에게 와 닿아 판단케하고 역사케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놓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설교는 연설이아니며 개인의 능력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설교자를 통하여 전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이 계시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역사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에서 이루어진것 아님을 잘 아실텐데도 편협적인 학문적 판단으로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는것 같습니다. 수영로교회의 성장 비결은 정필도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능력과 열정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인것입니다. 정목사님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필요성을 부인하시진 않으시리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다시한번 성령의 역사가 계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도 현실적 안목으로만 판단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내적 역사에 관심을 가지시고 체험하기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목사님 글에 대한 비평에 목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들 평범한 일반 교인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하나님사랑7 하나님사랑7 ssja5302@hanmail.net Y 2006.06.19 13:21:33
길고 긴 내용의 글을 참 의미있고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그 중심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면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고백해 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사역이 곧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이
있다고 고백해 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통해서 강하게 일하시는 신실한 분이시기에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누어 주신 글 잘읽었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글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 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로서 세워지기 위하여
하나님만 잠잠이 바라보아야 함을 고백해 봅니다.
탱이님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안에서 강건하시며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탱이 탱이 http://blog.daum.net/chilchundo Y 2006.06.19 15:14:56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빨간_장미 빨간_장미 rich1961@hanmail.net Y 2006.06.22 11:25:50
긴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아무리 잘짜여진 집이나 시나 작문일찌라도 자신이 만든 집이나 글이 행복할수없다면 감동이 없다면 아무의미없는 공간이나 문자에 불가하겠지요 그러나 자신이 지은집이나 글에 자신의 영혼과 사랑을 부었다면 그것은 타자들에게 충분한 메세지가 아닐까요 성경이 성령의 감동없이 쓰여지지 않았다면 문제의 요지가 많듯이 정필도 목사님도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영혼과 사랑으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요 성경에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렴 수영로 교회의 부흥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 같네요 모두가 성령의 민감한 자가 되면 다 보일텐데 감사합니다,
탱이 탱이 http://blog.daum.net/chilchundo Y 2006.06.22 11:34:35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고결론을 내리시면
이 글을 잘 못읽으신것 같네요
한나 한나 hee-jinmam@hanmail.net Y 2006.06.26 17:40:16
윗 평자는 수영로교회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폄하한 대책없는 철학자이군요. 철학자는 역시 철학자, 은혜를 모르는 철학자의 신세 한탄의 평글이군요.쯧쯧쯧~
창다이 창다이 http://@joins.com Y 2006.07.01 09:04:19
장문의 내용을 다 읽고나니 머리가 아프군요 역시 철학자적 안목으로 바라보시며 냉철하게 판단하신것 같습니다. 많은 부분이 현실적 학문의 기준으로 볼때 사실인 것 같습니다.이 한편의 글을 쓰시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며 존경합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종교가 기독교 인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아직 현실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설명할수 없는 많은 부분에 대한 내적 체험이 없으신것 같습니다. 아니 관심도 없으신것 같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의 설교의 많은 오류와 문제점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믿으신다면 결론은 듣는 개개인의 성도에게 와 닿아 판단케하고 역사케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놓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설교는 연설이아니며 개인의 능력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설교자를 통하여 전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이 계시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역사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에서 이루어진것 아님을 잘 아실텐데도 편협적인 학문적 판단으로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는것 같습니다. 수영로교회의 성장 비결은 정필도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능력과 열정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인것입니다. 정목사님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필요성을 부인하시진 않으시리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다시한번 성령의 역사가 계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도 현실적 안목으로만 판단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내적 역사에 관심을 가지시고 체험하기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2006.07.01 23:50:37
다른 블로그에 실린 내 글에 대한 대글에 대해서
지금 내가 할말은 별로 많지 않군요.
교회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하나로 보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내 글은 철학적인 게 아닌데도 철학자의 글이라고 본 분들도 있군요.
감사.
지금 내가 할말은 별로 많지 않군요.
교회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하나로 보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내 글은 철학적인 게 아닌데도 철학자의 글이라고 본 분들도 있군요.
감사.
2006.07.05 14:17:43
칸트님과 정목사님의 오고간 대화속에
지적인 냄세와 충분한 두분에 교감속에 많은 것을 생각 하게 하는군요
두분의 대화가 무척 부럽습니다.
여기 다비아는 많은 분들이 오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준 높은 두분에 대화속에 두분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해 할수있는 평범한 언어로 교감해주시면 합니다.
왜야하면 너무 학문적 용어는 다른 사람 들에게는 방언이 될수 있구요 현학적이란 오해도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분에 깊이있는 대화 자주 접했으면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적인 냄세와 충분한 두분에 교감속에 많은 것을 생각 하게 하는군요
두분의 대화가 무척 부럽습니다.
여기 다비아는 많은 분들이 오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준 높은 두분에 대화속에 두분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해 할수있는 평범한 언어로 교감해주시면 합니다.
왜야하면 너무 학문적 용어는 다른 사람 들에게는 방언이 될수 있구요 현학적이란 오해도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분에 깊이있는 대화 자주 접했으면합니다. 감사합니다.
2006.07.14 14:00:35
우연히 정목사님의 비평글을 읽은 후
매일 몇편씩 다른 비평글도 읽게 되었습니다.
정목사님의 비평의 깊이에 종종 사전을 찾게도 되지만,,^^
정신을 가다듬어 다른 분들의 댓글까지 모두 읽고 나면,,
제 영혼과 이성에 생기가 돗고 , 뭐랄까 좋은 보약을 다려 먹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깊이 감사 드립니다.
매일 몇편씩 다른 비평글도 읽게 되었습니다.
정목사님의 비평의 깊이에 종종 사전을 찾게도 되지만,,^^
정신을 가다듬어 다른 분들의 댓글까지 모두 읽고 나면,,
제 영혼과 이성에 생기가 돗고 , 뭐랄까 좋은 보약을 다려 먹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깊이 감사 드립니다.
2006.12.31 03:29:15
안녕하세요. 오늘 가입 인사드립니다. 여기와서 글을 읽은 소감은 첫째, 솔직하고 날카로운 목사님 및 여러분들의 댓글에서 새로움을 느끼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지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따름입니다 -- 저는 이제 겨우 주님의 성령을 이해한 늦깍이 입니다.
조현아님의 글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리고 코람데오님의 조현아님에 대한 댓글에는 죄송하지만 동감할 수 가 없네요. 조현아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코람데오님께서는 그를 자랑하면 안된다에 촛점을 두시고 답하신것 같네요.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경험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 아님 제가 무지하고 죄에 빠져 몰랐던지요. 그러나 최근에서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구나 하고 주님 위주로 성경을 읽게 되고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 아닌가 하고 혼자 자위하는 정도지요.
그리고 정용섭 목사님의 글 참 신선하고 날카로운 듣고 싶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너무 성경 해석 위주로 비평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소 그런 비평이 없던 터라 누군가가 십자가를 메고 더욱 잘 되라는 의미에서 채찍질 하는 것은 바람직ㅎㅏㄷ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목사님꼐서도 나만의 방법 -- 성격을 해석적으로만 이해하는 -- 만이 옳다고 주장하신다면 여기 비평에 등장한 다른 목사님들과 하나 차이가 없겠지요. 아니 도리어 바리세인처럼 도리어 일반 교인을 현혹하는 독이 될 수 도 있겠지요.
목사님 비평을 보면 (1) 성경 해석 위주의 해석이시고 (2) 성경을 떠난 설교 -- 예를 들어서 경험이나 간증 위주의 설교는 상당히 배타적이신것 같습니다. 본인이 경험해 보시지 못했거나 본인의 명철한 지식으로 마음에 안든다고 나쁘다고 만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목사님의 글에서 상당히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 결코 목사님께서 자기 자랑을 하신다거나 겸손하시지 않다는 것은 아님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투 한구석에는 그런 마음이 있는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한 세상에 한 방법만으로 설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까요? ㄸㅒ로는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저런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 할 수 도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여기 나오는 정필도 목사님 처럼 -- 저는 이분이 누군지 전혀 모르나 -- 스스로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떠벌리는 사람에게 저도 한ㄸㅒ 상당히 혐오감을 느꼈더랬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건 아니건 그건 우리가 감히 논할꼐 못된다고 봅니다 -- 그건 그분과 하나님과의 일이겠지요.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하셨다면 그분이 응당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그 이유를 해명하셔야 겠지요 -- 하나 우리에게는 해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리가 주님이 아니니깐요. 단지 그분 때문에 많은 분들이 기독교를 ㅁㅣㅈ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써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야 겠지요.
위의 분들처럼 논리있게 성경 말씀을 예시도 드리지 못하고 그냥 저의 느낌만을 적어서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디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조현아님의 글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리고 코람데오님의 조현아님에 대한 댓글에는 죄송하지만 동감할 수 가 없네요. 조현아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코람데오님께서는 그를 자랑하면 안된다에 촛점을 두시고 답하신것 같네요.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경험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 아님 제가 무지하고 죄에 빠져 몰랐던지요. 그러나 최근에서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구나 하고 주님 위주로 성경을 읽게 되고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 아닌가 하고 혼자 자위하는 정도지요.
그리고 정용섭 목사님의 글 참 신선하고 날카로운 듣고 싶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너무 성경 해석 위주로 비평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소 그런 비평이 없던 터라 누군가가 십자가를 메고 더욱 잘 되라는 의미에서 채찍질 하는 것은 바람직ㅎㅏㄷ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목사님꼐서도 나만의 방법 -- 성격을 해석적으로만 이해하는 -- 만이 옳다고 주장하신다면 여기 비평에 등장한 다른 목사님들과 하나 차이가 없겠지요. 아니 도리어 바리세인처럼 도리어 일반 교인을 현혹하는 독이 될 수 도 있겠지요.
목사님 비평을 보면 (1) 성경 해석 위주의 해석이시고 (2) 성경을 떠난 설교 -- 예를 들어서 경험이나 간증 위주의 설교는 상당히 배타적이신것 같습니다. 본인이 경험해 보시지 못했거나 본인의 명철한 지식으로 마음에 안든다고 나쁘다고 만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목사님의 글에서 상당히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 결코 목사님께서 자기 자랑을 하신다거나 겸손하시지 않다는 것은 아님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투 한구석에는 그런 마음이 있는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한 세상에 한 방법만으로 설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까요? ㄸㅒ로는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저런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 할 수 도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여기 나오는 정필도 목사님 처럼 -- 저는 이분이 누군지 전혀 모르나 -- 스스로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떠벌리는 사람에게 저도 한ㄸㅒ 상당히 혐오감을 느꼈더랬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건 아니건 그건 우리가 감히 논할꼐 못된다고 봅니다 -- 그건 그분과 하나님과의 일이겠지요.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하셨다면 그분이 응당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그 이유를 해명하셔야 겠지요 -- 하나 우리에게는 해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리가 주님이 아니니깐요. 단지 그분 때문에 많은 분들이 기독교를 ㅁㅣㅈ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써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야 겠지요.
위의 분들처럼 논리있게 성경 말씀을 예시도 드리지 못하고 그냥 저의 느낌만을 적어서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디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舌敎者와 說敎者 사이에서 또 한번 고민해야 겠네요. 이번에도 어려운 작업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