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9일
믿음과 확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개념 규정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들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곧 삶의 확신이라는 말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확신과 거리가 멀다. 겉으로는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불안에 가깝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확신의 근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으로 삶의 확신은 가능하지 않다. 주식 투자를 생각해보라. 매 순간에 주식의 등락에 따라서 마음이 요동친다. 자식 교육에 몰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쁨을 줄 때도 있지만 낙심을 줄 때도 많다.
믿음이 어떻게 삶의 확신이라는 말인가? 이걸 기계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에 나가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당장 확신의 삶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또는 심리적으로 자기 확신에 빠져드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로 들어가는 인식이자 의지이고 결단이다.’는 사실을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하다. 그걸 아는 사람은 삶의 확신을 얻는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과 같다.
우리 선생님이 또 어떻게 설명하실지 저도 기다리면서.
그 전에 다비아를 통해 공부하는 classmate로서 알아야님의 질문에 같이 참여해 봅니다^^
얼마전 은나라님의 질문에 답한 정목사님의 댓글 참조해 보시라고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관계라...,
여기선 존재론과 인식론이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론'이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지요?
그걸 빼고 말하는 게 좋긴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외의 것들이 다 뒤로 물러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외의 것들이라서
그것을 뒤로 물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꾸로 그외의 것들을 찾게 됩니다.
그게 믿음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하고, 선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게 없으면 도대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에 잡히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들어가면
그 이외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문제지만요.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온 거에요.
둘째와 아버지의 관계가 존재론적인 거지요.
큰 아들은 좀 달라요.
왜 그런지는 아실 거구요.
존재론적인 관계로 들어가는 거와 일상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거는
좀 다른 이야기에요.
이렇게 말하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삶의 태도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직면하듯이!
열심히 공부하는 다비안 덕분에 예전 글을 다시 읽게 되었고
(다비아엔 좋은 읽을 글이 많고 또 읽었다고 내 것이 되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떤 기회에
다시 읽게 되고 새롭게 직면하게 함)
덕분에 눈이 확 뜨이는 답변을 얻게 되었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 이외의 것이 다 뒤로 물러난다. . 근데 왜 자꾸 그 이외의 것들에 붙잡히는지'
저장해 놓고 한번씩 읽어 보고 있어요.
http://dabia.net/xe/study2/573926#comment_882869
다비안들은 이렇게 다 서로 영향(도움)을 받으면서 사는것 같네요
이런 공간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뜬금없이 새삼 표현해 봅니다.
마지막 문단에 오타 발견했어요. ^^ : 심리적으로 자기 확신에 빠져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니다.
목사님 질문이 있어요. 존재론적 관계는 무슨 뜻이죠? 철학 시간에 많이 접한 용어인데, 20년 전 일이라 ㅋ 목사님 글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철학 시간에 나오는 의미와 같은가요? 설명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로 들어가는 인식이자 의지이고 결단이다.’
인식, 의지, 결단... 정말 마음에 드는 단어들입니다. 일단 알아야하고, 뜻을 세우고, 실천하고......
저는 지금 인식 단계인 것 같네요. 그 인식도 겨우 1mm 늘여가고 있고요. 달팽이의 속도로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