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4일
하나냐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논쟁이 렘 28장에 나오니 집에서 각자 읽어보라고 설교시간에 말했다. 1,2절은 다음과 같다.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하나냐의 예언은 불안해하던 유다 사람들에게 격려가 될 만하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그런 기운이 전달된다. 사람들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준다거나 해결해준다는 말을 들으면 위로를 얻는다. 실제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거나, 믿고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걸 이루어주신다는 설교에 나름으로 위로를 받는다. 회중들의 약한 심리가 선지자들과 설교자들로 하여금 아무런 근거가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하게 만든다. 악순환이다.
하나냐를 거짓 선지자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누가 유다 민족의 미래를 100% 단정적으로 예단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냐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그렇게 예언했다. 그는 역사를 읽어낼 능력이 부족했다. 그런 능력이 부족하면 예언의 능력도 떨어진다. 오늘날 목사들도 세상과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통찰이 없으면 신앙과 인격의 진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옳은 설교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를 무조건 100% 옳은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세상을 읽는 능력이, 이는 곧 인문학적 통찰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냐보다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옳은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반론이 가능하다. 선지자나 설교자에게는 인문학적 통찰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즉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고 그것을 선지자들이 받아들이는 신탁(神託) 사건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옳다. 인문학적 통찰 자체가 이런 신탁 사건에 속한다. 세계를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우주 물리학에 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