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일
이 뭐꼬?
신학대학교 다닐 때부터, 아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더 어릴 때부터 ‘이 뭐꼬?’라는 화두는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어떤 일에 빠져 있을 때 말고는 늘 그랬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 비가 그친 저녁 무렵부터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이 마당을 정리했다. 흙이 비에 젖어 잡초 뽑기가 좋았다. 손으로 뽑히는 건 손으로 뽑고, 안 되는 건 호미로 뿌리를 치면서 뽑았다. 기계적인 동작이지만 온몸으로 사물과 접촉하는 즐거움이 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 순간의 미묘한 느낌이 어떤지는 다 알 것이다.
바로 그때 갑자기 바로 발밑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새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마당 바로 아래에 대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그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눈에 보이는 않는다. 아마 참새 새끼 떼가 거기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유치원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와 같았다.
육십대 중반의 한 남자는 잡초를 뽑고, 참새 떼는 대나무 숲에서 합창을 하고, 손님이 온 아랫집에서는 빨리 밥 먹자는 말소리가 나고,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멀찍이 더 깊은 숲에 자리한 집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마을 한 가운데를 흐르는 도랑은 콸콸 소리를 내고, 이따금 힘 잃은 모기가 달려들고 ..., 이 모든 현상의 뿌리는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이런 화두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일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무한 공급받는 입장으로서..^^
어제 오늘 이 묵상이 저한테는 푸른초장으로 인도되는 말씀이었는데요.
저희 집 근처에 두세시간 정도 등산하기 딱 좋은 산이 있어요.
산 중턱에 가면 나이 많은 소나무들도 많고요.
밤나무들도 많아서 곧 알밤도 줏게 될거예요.
저는 목사님 말씀을 읽은 후,
자연이나 사물, 사건을 내 식으로 해석하지 말고
보이는대로, 들리는대로 받아드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리고서 천천히 걸으면서 평소와 다른 시각으로 보이는지
실험을 해 봤어요.
우선은 새소리가 더 청명하게 들려오고요.
바람도 더 상쾌하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인사가 반갑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들의 재잘거림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
청솔모들이 잣송이를 따서 땅에 던지는데요.
사람들에게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또 얼마나 이쁜지..
결정적인 것은 제가 사람들 없을 때 소나무들을 안아주었다는 건데요.
그냥 안아주고 볼을 비벼주고 싶더라구요.^^
목사님, 저는 아직도 진리가 뭔지 진짜 모르겠어요.
목사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이 뭐꼬'도
저도 나름으로 몇 십년을 붙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진리에 대해 목말라 있고요.
다만, 어제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진리가 하이데거의 말대로
감춰지지 않음, 드러남, 계시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드러나는 자체'를 내 사변으로 필터링하지 않고
'드러남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볼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진리에 더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야, 풀벌레소리도, 고양이 소리도,
소나무의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근원적인 것과 잇대어 있다는 생각까지 해보는데요.
그러고보니, 새들에게 설교했다는 프란시스코 이야기가 전설만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목사님의 고민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갑니다.
매주 그런 물음과 고민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주시겠죠.
그래서인지 목사님 설교가 저에게 잘 와닿나 봅니다,
신앙적 행동을 불러일으키려는게 아니라
하나님나라와 인간의 근본적인 궁금증과 문제에 깊이 있는 통찰을 시도하시니 말입니다.
제대로 표현을 한게 맞나 모르겠습니다.
언젠간 저도 다시 설교자가 되고싶은데 아직 자신이 생기지가 않네요.
알려고 할수록 더욱더 모르겠으니 말이죠.
목사님이 안도현씨의 한 책의 인사말을 읽어주셨던 내용처럼
잡히지 않는 허공과 같네요.
앞으로도 당분간은, 혹은 오래도록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