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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5일
‘미워하라.’
어제 설교의 성경 본문에는 ‘미워하라.’는 말이 반복된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했다. 십자가를 지라거나 소유를 버리라는 말도 다 미워하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이런 표현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생(生)철학의 대표자인 니체일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이런 자기 부정은 생을 말살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태도를 취했다. 청교도들의 도덕주의 영성은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금욕과 자학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이런 금욕적이고 자학적인 영성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요한 웨슬레와 청교도 지도자들도 이 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분명한 것은 청교도 신앙이 기독교 영성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워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설교에서 설명했다. 가족과 소유와 자기를 실제로 거부하라는 게 아니라 각각 거기에 걸맞게 대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그 방식이 아니면 인간 구원은 불가능하다. 본문 표현으로, 그 방식이 아니면 예수 제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잠정적인 것을 절대화하면 실제로 절대적인 것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워하라.’는 말은 지혜롭게 ‘사랑하라.’는 말의 역설적 표현이 아닐는지.
제가 엊그제 동네 산행 이야기를 말씀드렸는데요,
오늘도 산 이야기로 이 묵상말씀을 이해해 보고 싶어져서요.
얼마전 설교에서 메멘토 모리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산위에서 산 밑을 바라볼때 그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데요.
죽음을 산정상이라고 가정하고 내 삶을 내려다보자 는 거여요.
그랬더니 산위(죽음)에서 바라보는 동네는 내것도 네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여요.
평등해 보일뿐이죠. 그리고 평온해보이기까지 하더라구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미워하라' '소유를 버리라'도 이해하고 싶었어요.
죽음의 선상에서 내려다보자..그리고 내 믿음의 분량만큼 해결해 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