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새로 쓴 갈라디아서 독후감

Views 1331 Votes 1 2017.07.20 20:42:48
관련링크 :  

<갈라디아서 독후감>

 

바울의 회심은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그는 역사적 유대인 예수를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도 예수 이야기를 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은 그런 바울이 주제넘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바울이 바나바와 이방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존경받던 유대인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확증을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예수 체험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동질감을 느꼈을까? 이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우주적 그리스도로 만나게 되었다. 역사적 유대인이었던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속에 숨어 있던 진리의 은 바울, 아니 인간의 내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보편 절대의 진리적 직관 - 계시의 영역 - 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런 거 경험해 본적 없는가? 어느 날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읽었는데 그 시, 그 글자, 그 상징들이 뭐라고 나의 가슴에 사무치면서 잠을 설치게 했던 그런 경험 말이다, 정작 나는 윤동주를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는데...)

 

그는 당시 보편적 사유체계였던 헬레니즘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우주적 그리스도로 변용했다. 바울 당시 그리스도교는 유대 국지적(local) 종교의 길과 세계적 보편 종교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그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의 종교 중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서, 유대교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녹아들어갔거나, 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 갈림길에 할례가 턱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 뿐만 아니라 민족적 자부심이었다. 또한 그 당시 그리스도교의 주도권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들이 잡고 있었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마이너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은근히 할례의 압박을 받거나 유혹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 가지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은 할례에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바울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아버지가 헬라인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했다는 것이다. 이 것은 바울이 할례의 문제를 건드린 것이 할례 그 자체보다는 유대 그리스도교에 어떤 큰 싸움을 걸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방 그리스도교를 유대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차별화 하려는 바울의 종교적 야심의 발로였을까? 어쨌든 갈라디아서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건 싸움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2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자신의 일치를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이론가이기 이전에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신비적 영성가였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며 그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상징은 바울 내면 - 사실 보편적 인간 내면 - 의 그리스도 원형을 꽃피우며 누미노제적 체험으로 몰아간 것 같다. (융의 말을 빌려 보면 영혼 속에 그리스도가 꽃핀 인간은 자아(ego) 중심적 삶에서 죽고, 본연적 자기(Self) 중심적 삶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게 기독교적으로는 십자가 죽음이며 부활이다. 자아가 탑을 높이 쌓아가는 삶을 만들어간다면 자기는 뿌리를 깊이 내리는 삶을 만들어 간다. 복음서에 나오듯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은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 기초가 튼튼한, 무너지지 않는 집을 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바울은 모세의 율법 이전에 이루어졌던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약속에 주목한다. 율법이 그 약속을 폐기할 수 없으며, 율법은 살아있는 하느님과의 신뢰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전까지 후견인 역할을 한 것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319-20 절 말씀은 예전에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 쪽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부분은 해석만도 100여 가지가 넘는 난해구라고 한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보면서 그냥 글자 그대로 따라서 번역해보았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이 것은 약속된 씨(후손: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을 위해서(범죄들의 항목을 늘이기 위해서) 추가되어진 것으로, 천사를 통하여 중개자의 손으로 지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개자는 하나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중개자는 하나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이게 뭔 말인가? , 중개자는 일관성이 없지만, 하나님은 일관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것은 어쩌면 율법이란 것이 중개자 모세로부터 온 것이긴 하지만, 여러 세대를 통해서 해석되고 세칙들이 덧붙여 진 것으로 서로 상충하며 모순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표현한다. 결국 이 말씀은 중개자에 의해서 제정된 율법의 불완전성에 대비해서, 하느님의 약속과 은혜의 완전성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 와중에 공동번역의 번역이 멋지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328-29절에서 그리스도의 가족으로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자유인과 종, 여성과 남성의 구별은 의미가 없고 모두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 당시 시대적 분위기로 보았을 때 이 것은 엄청난 자유와 해방의 선언이다. 나는 여기서 바울이 건 싸움의 정당성을 느낀다. 지금 전체주의적 집단 종교의 모습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종교의 지도자들이 최고 율법 회의인 샤리아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고 있는 이슬람의 꼴을 보면 그 당시 유대교뿐 아니라 유대 그리스도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의 시도는 율법과 체제에 바탕을 둔 집단적 종교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종교로 종교 해방의 첫 삽을 뜬 의미도 있다.

 

4장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상속자일지라도 어렸을 때는 선생과 후견인의 보호 아래 있는 종과 다름없는 사람이지만, 보호를 벗어나 성인이 되었을 때는 우리는 완전한 상속자가 된다는 비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출현을 통하여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는 노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이 주는 거룩한 영으로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로서 입양되어 자유인이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긴 전에 가짜 신들에도 사로잡혀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인습과 금기를 지키고, 어떤 특별한 날, 절기, 해와 연관된 미신들을 지켰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면서 그런 것들에서 해방되는가 싶더니 또 다시 할례가 대표하는 율법에 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노예가 되고 싶은 것은 인간 내면의 관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지키기를 종용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선생들을 사악한 이단이라고 일갈한다. 약간 오바스럽긴 하지만 바울답다. 이 지점에서 나는 바울의 그리스도교가 유대의 그리스도교와 결별하는 전조를 느낀다. (결국 유대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바울의 이방 그리스도교는 보편적 세계 종교가 되었다.)

 

4장 후반부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비유를 통하여 자유인인 약속의 자식과 노예인 율법의 자식을 비교한다.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강요하는 것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에 빗대어 이야기 한다. (내가 볼 때 이 부분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는좀 억지스럽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이 것은 그 당시에 구약의 경전에서 끌어대어 증명하던 흔한 방식이었다. 시대적 한계...)

 

5장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허락한 자유를 할례라는 율법과 바꾸지 말라고 당부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허락한 그 자유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도리어 자유를 파괴하는 핑계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자유의 극단적 형태는 방종이며, 방종은 또 다른 형태의 노예 상태임을 바울은 꿰뚫어본 것 같다. , 율법적 삶 뿐만 아니라 방종의 삶 또한 노예적 삶임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 즉 그의 숨결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영으로 살아가는 삶은 자아(ego) 중심적인 삶처럼 얕은 수준일 수가 없다. 그 것은 깊은 내면 속에 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 있는 자기(Self)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깊은 수준의 삶이다.

 

바울 서신이 항상 그런 것처럼 5장의 후반부와 6장에서는 구체적인 삶의 지침들을 이야기 한다. 솔직히 이 부분들은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읽으면 따분하긴 하지만 결국 삶의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라는 이야기다.

 

장황하게 갈라디아서를 읽은 소감을 썼는데, 역사는 현실의 거울이 될 때에만 의미가 있듯이, 갈라디아서 또한 역시 지금 현실의 거울이어야만 한다.

 

개신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어떨까?

 

세상의 보편 진리적 철학과 종교, 상식과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열려 있는 풍부한 상징의 종교로 성장하고 있기보다는, 편협한 종파성과 화석화된 교리에 갇히면서 빈약한 기호의 종교로 쇠퇴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안타깝게도 개신교는 창조성을 잃고 점점 규범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점점 종교적 기호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과거 제네바에서 칼빈이 무시무시한 실패를 맛보았을 뿐인 성시화를 꿈꾸며 영역 확장에만 골몰하면서, 10년 후, 20년 후의 교세만을 걱정하는 모습은 얼마나 한국 개신교회가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주는 증거다.

 

유대인 그리스도교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면서 그들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며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려 했던 것처럼, 지금의 성직자들도 종교적 규범으로 교인들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내가 볼 때 다수의 대형 교회들은 이미 성직자들이 예수를 얼굴 마담으로 세우고 자신들의 자아를 실현하는 장이 되어버렸다. 거기에다가 잘 나가는 성직자들의 권위라는 뽕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교인들은 알아서 기꺼이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처한다.

 

기독교인들은 밖으로부터 오는 권위에 너무 의존적이다. 밖에서 그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고 또한 밖에다가 자신들의 바램인 어떤 전지전능한 가상의 신을 투사한다. 또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해야하는 우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에크하르트의 이 매력적인 말에 항상 집중한다:

 

<영혼의 불꽃,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창조되지 않은 그 무엇>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내면의 깊음 속에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그 무엇에 집중해야 한다. 그 것이야말로 바울이 경험한 그리스도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서로 공명하며 사랑할 수 있는 내적 힘의 원천!

 

유진 피터슨이 Message 성경의 도입부에 써 놓은 한 문장이 인상 깊어서 그 문장으로 이 글을 가름 할까 한다.

 

“God did not coerce us from without, but set us free from within" (하느님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복종하도록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profile

정용섭

2017.07.22 00:01:47
*.164.153.48

와, 대단하시네요.

신학잡지에 실을만한 논문을 쓰셨군요.

전체적으로 쭉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브니엘남

2017.07.25 06:18:12
*.118.79.9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갈라디아서 3장 19절로부터 20절 말씀을 내 식으로 하여 해석해 봅니다. 참고하여 주십시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율법은 범죄 때문에 더하여졌으며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전해진 것인데 약속된 씨가 오실 때까지 있을 것입니다. 중보자는 한 편 만을 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약속이 주어진 것과 달리,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전해졌으며 또한 직접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에서 주된 것이 아니고 부차적인 것이다. 율법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양편 사이에 중보자가 있다. 약속에는 중개인이 없고, 약속을 받는 사람과 그와 직접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께서 계신다. 율법에 관한 책임은 한 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 편에 있지만, 약속에 관한 책임은 약속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율법은 약속보다 못하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월등한 것을 버리고 오히려 열등한 것으로 되돌아갔다.

첫날처럼

2017.07.27 14:56:41
*.168.51.35

설득력 있는 해석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한편만의 중보자" 라는 부분에 대한 해석이 명확한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복서겸파이터

2018.08.19 21:00:06
*.235.119.186

선생님이 쓰신 글을 주일 저녁에 하나씩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ㅎㅎ 감사드립니다.

List of Articles
No. Subject Author Date Views
7313 2017년 대구샘터교회 수련회를 마치고. . . [6] 홍새로 Aug 20, 2017 1007
7312 쉬운 책이 좋은 책 최용우 Aug 19, 2017 744
7311 만두 설렁탕 file [5] 정용섭 Aug 18, 2017 1619
7310 유목민(임영웅목사님) 기사가 나왔네요 ^^ [2] 새하늘 Aug 18, 2017 1119
7309 떠날 때 file [2] 최용우 Aug 18, 2017 765
7308 즈베레프 정용섭 Aug 15, 2017 914
7307 영천 도서관에서 file [4] 정용섭 Aug 04, 2017 1616
7306 정용섭 목사님의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를 묵상 후.... [2] 하늘연어 Aug 04, 2017 980
7305 진안 여행기: 콰미와 웃겨 누님, 이 선생님을 만나기 [6] 첫날처럼 Jul 31, 2017 1236
7304 '계시'에 관하여... [2] 첫날처럼 Jul 24, 2017 769
7303 백건우 [3] 정용섭 Jul 22, 2017 841
7302 돈 줘 file [1] 최용우 Jul 22, 2017 1649
» 새로 쓴 갈라디아서 독후감 [4] 첫날처럼 Jul 20, 2017 1331
7300 (신간 소개) 김균진 교수의 "기독교 신학 4권" 신학공부 Jul 18, 2017 1470
7299 하나님의 얼굴 [1] 최용우 Jul 15, 2017 168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